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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미 Apr 30. 2018

초록색 물통

싫다는 말을 하기까지

늘 물통을 가지고 다녔다. 


녹색 계열의 플라스틱 물통이었는데, 시시때때로 물을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복도에 있는 정수기에 물을 가득 받으러 가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초록색 플라스틱에 안에 들어있는 차가운 물이 찰랑 거리며 더 영롱한 색깔을 뗬다. 그렇게 물통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주위에 있던 친구들이 한입만 달라며 몰려왔다. 친한 사람이든,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든 그들은 내 동의를 구하기도 전에 이미 내 초록색 물통을 들고 돌아가면서 한입 씩 마셔댔다. 내가 떠온 물은 늘 그렇게 너무 쉽고 빠르게 사라졌다. 그렇게 가벼워진 나의 물통은 책상이 조금만 흔들려도 툭 하고 떨어지곤 했다. 학창 시절의 나는 마치 그 물통 같았다. 바람이 불어도 쿵, 누가 살짝 밀어도 쿵.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심이 없었기에 이리저리 흔들린 채로 추락했다. 딱히 거절할 명확한 이유도 찾지 못했다.  


사실 내 물통을 그 누구에게도 빌려주기 싫었다. 마음대로 가져가 버리는 것도 싫었고, 다른 사람의 손때가 타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가져가 버리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고, 물통 하나 가지고 참 치사하게 군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기에 침묵했다. 그렇게 주인을 잃은 물통은 교실 안에서 돌고 돌았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도 못 하고, 멍하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제공해주었다. 혹시라도 물통을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은 날이면, 짜증 섞인 말투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마른 목을 적셔주지 못한 것은 분명 내 잘못이 아닐 텐데 마치 임의대로 ‘오늘은 물을 제공해드릴 수 없습니다. 돌아가세요.’라고 통보라도 받은 듯이 나를 원망 섞인 눈빛으로 보았다. 유독 내 앞자리에 앉은 여자애가 주요 단골 고객이었다. 처음에는 몇 번 말을 거는 식으로 빌려달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옆 친구와 떠들면서 아무런 양해 없이 슬쩍 가져갔다. 심지어 이동 수업이 있는 여러 모로 복잡한 날에는 내가 직접 말하기 전에는 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내 물통을 밥 먹듯이 가져가 놓고는 고맙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싫다는 말을 하기까지


고민 끝에 그녀의 손짓이 물통의 겉면에 닿기 전에 먼저 낚아채고는, 빌려주기 싫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당황한 듯 보였으나, '아, 그래?'라고 한 뒤 별 대수롭지 않게 다른 물통을 구하러 자리를 떠났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이상 내 물통을 함부로 가져가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왜 그 한마디를 하지 못했을까, 나를 함부로 방치해도 괜찮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을까? 


나의 초록색 물통은 더욱더 영롱한 빛깔을 띄었다. 어차피 졸업과 동시에 어디론가 버려질 내 물통이지만,  

그 물통을 지킴으로써 점점 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을 느꼈다. 


흔들리지 않을 지어다

글/그림 여미

커버사진 임경복

yeoulhan@nate.com


여미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yeomi_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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