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쉴 수 없게 된 나를 위해
작년 10월 말, 나는 각막 미란을 진단받았다. 각막미란이라는 질병은 각막에 스크래치가 생겨 잠깐도 눈을 뜨는 것이 어렵고 눈물과 함께 통증이 시작되어 매우 고통스러운 질병이다. 3분 가까이도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쉽지 않았고, 내가 열심히 해오던 모임 진행과 업무와 공부를 모두 멈춰야 했다.
그리고 2023년 4월 4일 나는 첫 상담을 시작하게 되었다. 조금 더 빨리 상담을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11월부터 3월까지 나는 긴 시간 잠도 잘 이루지 못했고, 식사하는 것이 힘들었고, 많이 불안했고, 정체도 모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나는 직장에 병가를 내고 제주도로 향했었다. 그 섬이 나를 치유해 줄 수 있다고 믿었을까? 하지만 나는 더 상태가 악화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불면과 식이 장애만 있던 상태였는데, 깊은 우울감과 무기력으로 인해 침대 밖으로 한 달 동안 나오지 못했다. 24시간이라는 시간이 너무도 길게만 느껴졌고, 매일 음식을 차리고, 먹고, 씻고, 간단한 운동을 하는 일상적인 루틴조차 내게는 너무 버거웠다. 마치 내 몸에 누군가 1톤이나 되는 무게 추를 달아놓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아 심리 상담소를 열심히 검색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종종 눈에 띄었던 심리 상담소가 기억이 났다. 표현 예술 치료를 함께 하던 곳이라 관심 있었던 분야였기에 동네 산책하면서도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상담 선생님께서는 바로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셨고, 종합심리검사(풀 배터리 심리검사)를 하고 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상담을 진행하고자 하셨다. 종합심리검사는 임상 심리사가 있는 곳에서 진행할 수 있고, 시간은 4-5시간, 비용은 4-50만 원대로 한 사람의 심리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다양한 검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까지 받아볼 수 있는 검사였다.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나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셨기에, 1급 임상 심리사가 있는 곳을 찾아 종합 심리검사를 진행했다. 긴 시간 질문에 답하고, 수백 개 가까이 되는 질문지에 대한 답을 체크하고, 때로는 내면의 고통도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를 받아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아래는 MMPI 검사에 대한 선생님의 해석의 일부이다.
"MMPI 타당도 척도를 살펴보면, 현재 내담자는 자신의 결점이나 수용하기 힘든 인간적 욕구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답하였으나 현재 자신의 심리적 문제나 어려움들에 대해서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는 느낌이 부족하여 helpless 해져 있는 것으로 보임. 특히 임상적인 수준에서 유의할 정도의 우울과 불안, 일반화된 공포감을 경험하고 있지만 이러한 정서를 만성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억압해 오면서 우울증으로 경험되고 있는 것으로 보임. 따라서 자신의 정서가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지에 대해 잘 모르며, 단지 불편감을 주는 사회적 상황을 피해 오고 있으며 때로는 현실세계에서 철회된 채 혼자만의 생각에 몰두하면서 기태적 감각 경험이 동반되는 것으로 보임"
상담 선생님은 결과를 천천히 해석해 주시면서 내가 구조 요청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조금은 심각한 상황일 수 있으며 세상에 대해 나를 살려달라고 구조 요청을 하고 있는 모습일 거라고. 1시간 가까이 결과 해석 상담을 들으며 좋은 결과는 아니었지만, 나의 지금 현재 상태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라고 생각이 들었다. 모든 치료는 정확한 진단이 먼저인데, 미루고 미루었지만 결국 종합 심리검사 결과를 받았고 병원에서도 진단과 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이 결과를 들고 상담 선생님께 가서 상담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던 것 같다.
이제 나의 내면의 어둠과 고통의 시간이 끝나고,
치유의 시간이 시작될 거라는 아주 작은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