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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샘 Apr 26. 2023

4회기 상담: 나를 통제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순간

의식적 자아의 소멸을 경험하며


_나를 살린 치유의 문장들

그 수많은 통제들은 어쩌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게 부여한 통제였을 거예요.

에고 데스(Ego eath)는 고통스럽지만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뉴본(New born)이 존재해요. 그 시간이 여울님에게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에고 데스 후의 세상은 똑같지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달라져 있을 거예요.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지만 여전히 세상에 대한 비난과 내가 융화되지 않는다는 감정이 여전히 있었을 거예요. 내가 노력하고 노력해도 이 사회는 비판적으로 보이고, 때문에 공허함은 계속 존재하죠.


내가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어 매주 떠나는 여행과 같이 느껴지는 상담. 10분이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상담소는 위치해 있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상담소를 찾게 된다. 상담소에 가는 길도, 푸른 식물들과 예술적인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 공간도, 화사한 미소로 맞아주시는 상담사님도 모두 나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오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통제'였다. 완벽주의라는 이름 아래에 내가 나를 통제하는 모습들을 나는 항상 마주하기 때문이다.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대학교 시절 이후에 완벽주의가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뿌리 깊은 통제는 지금도 살아서 나를 괴롭히곤 한다. 때문에 상담사님과 오늘은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 상담사님은 나의 고민에 대해 질문을 하나씩 던지셨다.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상담사님은 질문하셨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이 질문을 듣고는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지난주에 나누었던 이야기와 이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나, 결국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싶은 사람. 하지만 그렇게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고통받고 있는 것 같아요. "

"구애받지 않는 삶은 어떤 삶인가요?"


"과거에는 어떤 구조나 시스템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요즘에는 그것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영혼이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삶에서 통제로부터 자유롭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계신데, 아마 그 통제를 부여하고 있는 존재조차 여울님일 거예요. 사회가 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현존하는 삶 속에서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그것을 통제하나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나인 것 같아요. 아마 의식과 무의식의 싸움일 수도 있겠죠."


이 이야기를 듣고 충격에 빠졌다. 사회에 전반적인 흐름이나 사고들이 존재하지만 모두가 동일하게 통제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사회가 나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굉장히 타이트하게 통제하고 있었던 것은 놀랍게도 '나' 자신이었다.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구조 속에서 그 구조를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나는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통제로 나타났다.


왜 나는 나를 통제하기 시작했을까?


"저는 오랜 시간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문었을 거예요. 아마 중학교 때부터, 내가 경험하는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교사가 되고 싶다고 느꼈어요. 완벽주의가 생긴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교과 시험이 있으면 한 진도를 다섯 번 이상 보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았고, 전체 시험에서 몇 개 틀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리고 공부를 잘하려면 나의 모든 것을 통제했어야 했어요. 나태해지고자 하는 마음, 쉬고 싶은 마음, 좀 대충 해도 되지 않느냐는 마음... 다 누르고 누르고 눌렀어요. 그리고 내가 세운 목표만을 위해 달려갔죠."


"나태해지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나태해지면.... 음 저는 그때 당시 국가나 사회적 안전망을 떠나서 우리 가족의 안전망이 없는 느낌이었어요. 나태해지면 사회에서 완전히 도태되거나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꿈꾸는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상담사님은 곰곰이 들으시며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통제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셨다. 사회 속에서 나의 위치나 처해지는 상황이 굉장히 불안하고 내가 무엇인가 되지 않으면 불합리함을 당할 수도 있을거라고 걱정했을 것이다. 그 불안과 두려움은 내 가족 안에 존재했던 것인데, 불합리한 사회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이라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정의 내리며 살아온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나를 통제했고, 그것은 치열한 공부를 통해 나타났던 것이다. 공부라는 것은 나의 꿈을 위한 길이자 생존의 길이었다. 그때는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이제 교사라는 꿈을 이루었고 생존을 위해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나는 공부를 치열하게 하고 있었다. 다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삶. 언제나 내 삶에서 반복되는 이야기였다. 그 목표를 위해 마치 내가 생존을 위해 공부했던 학창 시절처럼,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 다시 공부하는 시간을 수도 없이 이어갔다. 방학 때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언제나 공부했다. 언젠가부터 나를 위한 삶이 아닌 '공부'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부를 하기 위해 살아가는 삶. 내가 이번 계기를 통해 깨닫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의 삶을 그렇게 경주마처럼 살아갔을 것이다. 주변은 돌아보지도 못한 채.


그리고 우리는 제주도에서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통을 받아 제주도로 떠났지만, 더 깊은 고통으로 찾아왔던 시간들이었다. 나에게는 그저 아픔의 시간들이어서 돌아보기도 싫었던 기억이지만 상담사님께서는 그 시간이 내게 '에고 데스'의 시간으로 찾아왔을 것이라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용어였다. 에고 데스는 의식적인 자아가 죽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 삶을 정의했던 것들, 살아왔던 모든 의식적인 방식들이 소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는 경험 후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경험들이었을 것이다.


사실 제주도로 떠날 때도 내가 했던 생각은 이 삶이 아닌데..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은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는데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때문에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파도라는 그림 한 점으로 남기고 떠났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그 파도라는 상징을 눈으로 만났을 때 내 마음은 요동쳤고 그 모든 시간들이 '나'라는 존재를 찾아가는 시간이라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면 에고 데스는 내게 왜 일어났을까.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지만 여전히 세상에 대한 비난과 내가 융화되지 않는다는 감정이 여전히 있었을 거예요. 내가 노력하고 노력해도 이 사회는 비판적으로 보이고, 때문에 공허함은 계속 존재하죠. 이 공허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에고 데스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 모든 뿌리에는 내가 누구고,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거예요."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이었다. 내게 왔던 이 모든 우울과 무기력과 같은 아픔들이 내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소멸의 시간이었다니... 완전히 다른 삶으로의 전환을 위한 소멸의 시간. 어찌 보면 당연히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세계관과 의식 속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를 추구한다면 과거의 의식적 자아는 당연히 소멸해야 했다. 그리고 그 소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이 존재하니 이것은 희망의 여정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아직은 막연하지만 우선 공부의 정의부터 바꾸어보고 싶다. 꿈을 이루고 생존하기 위한, 어쩌면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이제는 존재를 위한 공부를 해보고 싶다. 또한 통제가 아닌 자유를 위한 공부를 해보고 싶다.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존재를 알아가기 위한 공부, 현존의 삶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공부, 더 나아가 아픈 이들의 치유를 위한 공부.. 그리고 그 안에 예술이 함께 한다면 충분할 것 같았다. 내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 치유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금의 시간이라는 마음도. 1년의 휴식이 의미 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치유되는 시간이라면 그 시간은 충분한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상담사님은 인생에서 내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적이 있는지 물으셨다. 나는 미국에서 들었던 연수를 떠올렸다. 예술을 통한 트라우마 치유와 회복 탄력성 신장이라는 케이티의 워크숍이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케이티와 함께 춤과 그림, 시, 연극 등 다양한 표현 예술의 방법으로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졌던 시간. 그때 나는 마치 나의 존재를 처음 만나는 것처럼 설렜고, 온전했고, 자유로웠다.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나의 존재를 찾은 순간이라고 느껴졌고, 어떤 판단이나 비판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환대하는 자신을 발견했었다.


내 안에 나를 통제했던 수많은 밧줄들을 스스로 풀어내고, 온전히 나로서 현존하는 삶.

그것이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올해는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Ego Death를 그림으로 표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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