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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un 09. 2022

"나에게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단다."

워싱턴에서 온 닐과 함께한 저녁



안국역 6번 출구, 5시 50분. 우리가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나는 조금 먼저 도착해 인사동을 거닐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와보는 인사동, 그곳은 여전한 것 같으면서도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새로운 갤러리가 생기기도 하고, 전통 찻집이 관광객의 감소로 문을 닫은 곳도 보였다. 길을 지나며 보이는 작가들의 그림만 보면서도 마음이 행복해졌다. 시간을 내어 다시 이곳을 와서 천천히 작가들의 그림을 보고 싶었다.


닐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은경의 부탁으로 닐과 함께 연결되었다. 결혼식 때 만날 예정이었지만 미리 만나 서로를 알아가고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닐이 안국역 6번 출구까지 잘 올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은경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닐은 워싱턴 D.C에서 캐나다와 일본을 경유하는 길고도 긴 여행을 했다. 아직은 젊은 나에게도 벅찬 여행을 바로 어제 마친 닐이었다. 시간이 되었지만 역 주변에 닐이 보이지 않았다. 긴장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 메시지가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는데,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다. 10분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혹시나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오다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주변을 잠시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사동 문화의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지쳐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보였다. 키 큰 할아버지, 닐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전 여진이라고 해요. 당신은 닐이 맞을까요?"

" 안녕 여진!  난 닐이야. 만나서 반가워!"


여유롭게 웃으며 친절하게 인사를 해주는 닐. 첫 느낌은 참 따뜻했다. 그리고  닐의 안색을 보니 설마 걸어온 것은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보니 역시나였다. 한국에서 구매하여 충전한 교통카드가 왜인지 잘 작동하지 않았고, 닐은 서촌에서 30여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땀을 흘리며 걸어왔다.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조금 늦었다며 미안해했다. 나는 정말 괜찮다고, 피곤하지는 않은지 물어보았다.  


"I've been tired for 20 years."

(나는 20년 동안 피곤했어.)


닐의 유머에 걱정이 안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한 50대 동료 선생님께서 나이가 들면 잠을 자고 일어나도 피곤하고, 피로가 안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닐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말이 잠시 떠올랐다. 20년 동안 피곤했다니.. 이제 갓 20대를 지난 나에게는 상상의 영역이었고, 닐이 살고 있는 삶은 어떤 삶일까. 잠시 생각하며 예약해 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꽃, 밥에 피다."


왠지 맛있는 한식을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에 미쉐린  구르망에 선정된 작은 한옥집의 식당을 찾았다. 입구에 마련된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준비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은경의 결혼식을 오기 위해 닐이 워싱턴, 토론토, 일본을 거쳐  여행을  이야기, 토론토에서 비행기를 놓친 이야기, 한국에 와서 서촌 한옥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며 만난 사장님과 이웃들의 이야기, 닐이 하루 동안 서촌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처음 한국을 방문한 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서촌은  새로웠다.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닐은 즐겁게 여행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절하고 사교적인 사장님은 닐에게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아침으로 대접해주었고, 닐이 심심하지 않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사장님의 친절이 조금은 내향적인 닐에게 살짝 부담이 되어 혼자 있고 싶기도 했다고 하였다. 친절한 사장님께서 꾸민 게스트하우스의 정원과 한옥 사진을 보니 나의 마음도 따뜻해지는  같았다.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며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한식 코스 요리를 함께 먹으려고 했지만, 닐은 이미 점심에 초밥 뷔페에서 든든한 식사를 하고 왔다고 했다. 그래서 단품 메뉴를 함께 보기 시작했다.


'눈개승마 나물밥, 맥적 제육 비빔밥, 황태 만둣국과 자연재배 현미밥, 멍게 비빔밥, 채개장과 현미밥......'


메뉴판의 메뉴를 영어로 설명하려는데, 음....? 눈개승마, 황태, 멍게..?

아이고 쉽지 않다. 어찌어찌 채소가 올라간 밥이고, 돼지고기 요리며, 중국 딤섬 아냐고, 만두 좋아하냐고 설명하다가, 멍게를 만나 당황했다. 멍게..... 멍게? 멍게.......! 이 아이는 생선인지, 뭔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급하게 멍게 사진을 검색하여 보여줘도 이해가 간 눈치가 아니었다. 멍게가 미국에 없나 봐.... 하며 체념했다.

그러다 다시 번역기에서 멍게를 쳐보니 'sea squirt'라는 단어가 나와 보여주었다. 닐이 생선 비슷한 거냐고 하길래, 멍게도 해산물이니 그렇다고 했다.


음식이 나오고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닐은 황태 만둣국과 식사를 시켰고, 나는 눈개승마 나물밥을 시켰다. 감자 수프, 샐러드와 시작된 식사. 담백하고, 재료의 향을 살린 맛이 좋았다. 우리의 음식도 서로 함께 나누어가며 맛보았다. 역시 먹을 때 나는 참 행복하다.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음식의 맛들이 느껴지니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그리고 닐은 내가 페이스북에서 한 힘들었던 학생에 대하여 쓴 글도 읽었다고 했다. 긴 글이었음에도 번역기로 번역하여 읽으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환경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지켜본 알맹의 기사에 대해서도 사촌과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닐의 관심과 나에 대하여 알아가려는 마음에 대해 감사했다.


 내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먹었던 맛있는 타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닐의 길었던 삶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기자와 저널리스트로 시작해서, 그 당시 드물었던 컴퓨터 전문가가 되어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온 삶이었다. 닐에게는 낯선 국가였던 일본에서 공부를 했던 경험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이 여행 끝에 닐은 유럽의 아일랜드로 가서 불교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닐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것이 가능한 일정인가 싶었고, 그 열정과 의지가 감동적이었다.


닐과 함께 즐겁게 대화를 하고, 우리는 식사 후의 계획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나는 닐이 서울에 처음 왔으니, 남산타워나 한강, 청계천 같은 서울의 밤을 느낄 수 있는 곳을 함께 가려고 했다. 내가 뉴욕에 갔을 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맨해튼의 야경을 보며 즐거워했던 것처럼 닐에게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닐은 단호하게 말했다. No라고. 나는 잠깐 당황했다.


"나에게는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단다.

내가 너의 나이였다면, 많은 경험과 모험을 하는 것이 중요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렇지 않아. 오히려 일상의 작은 경험들이 나에게는 더 필요하지.

지금 한국의 음식들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 것도 나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었어.

오히려 한국 전통 시장이나 슈퍼마켓을 가보는 것은 어때?"


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에게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말이 가슴을 흔들었다. 나는 닐이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되고, 자유롭게 여행 다닐 수 있음을 부러워했지만, 닐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긴 삶의 나날들이 부럽다고 이야기했다. 내 눈에 반짝거리는 이 세상이, 화려해 보이는 것들이, 멋져 보이는 것들이 닐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닐에게는 오히려 사람들의 일상의 삶의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이 소중한 경험이 될 터였다. 나의 생각이 짧았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닐이 살아온 삶과 세월, 그리고 나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그저 삶의 다른 시기를 걷고 있는 친구와 함께 그의 마음을 느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좋고 화려한 것을 찾지 않고, 함께 인사동의 거리를 천천히 닐의 속도로 함께 거닐었다. 닐의 시선으로 본 인사동은 나에게도 새로웠다. 닐의 눈길이 간 곳에 나의 눈길이 갔고, 닐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했다. 커다란 붓 모양의 조각상, 화방에 걸린 거대한 필붓,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탈들을 지켜보는 닐. 그렇게 인사동의 밤길을 거닐었다. 그리고 정감 있는 한옥의 정원을 가진 전통 찻집에 들어가 다시 긴 대화를 나누었다. 닐이 한국에 머무는 짧은 일주일이지만 따뜻한 추억을 가져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워싱턴 DC와 해리슨 버그에 갔을 때, 나를 환대해준 수많은 이들처럼. 우리가 닐에게도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닐과의 만남은 나의 마음에 긴 여운을 남겼다.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되어 나눈 대화들은 나를 잠시 닐의 삶으로 데려가 주었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지 않은 날들이 짧아지게 되어, 너무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움켜쥐려 하지 않고, 베풀고 비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닐. 그 삶의 지혜를 지금의 내가 배워갈 수 있을까. 닮아갈 수 있을까. 삶의 여정이 끝을 향해 달려갈 때 후회하지 않도록, 더 나누고, 더 비우는 삶을 살아가보자. 멀리 서 온 친구가 나누어준 지혜를 소중히 기억하며.



2022. 6. 8. 닐과 함께한 저녁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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