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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Aug 10. 2022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삶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년 나는 나의 삶에 큰 의미이자 버팀목이었던 이를 떠나보내야 했다. 나의 큰삼촌, 그는 모든 형제들과 조카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셨던 분이다. 오랜 시간 나의 삶에 가르침을 주셨던 분. 작은 창을 바라볼 때에도 창에서 보이는 하늘처럼 세상을 품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해주셨던 분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네가 세상을 도울 큰 사람이 될 거라고 만날 때마다 말씀해 주셨다. 삼촌은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그 말씀을 해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내가 걸어가고자 하는 길이 힘들 때마다 다시 나를 붙들어주는 힘이 되었다. 혈액암으로 고통받는 10여 년의 긴 시간 동안에도 조카들이 전화를 걸면 남아있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이 겪은 삶의 지혜를 나누어 주셨던 그런 큰 사람. 큰삼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에게는 큰 별이 지는 것만 같았고 그 슬픔은 긴 시간 나와 함께했다.


그리고 한 달 전 나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겨주고 사랑해주는 그리고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남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너무도 건강하시던 분이었기에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고 처음으로 남편이 무너지는 모습을 봐야 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아버님, 우리가 함께할 행복한 나날들을 함께 꿈꾸었는데 우리에게는 그렇게 긴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남편은 순간순간 슬픔의 감정으로 빠져들었고 나는 그런 남편과 함께하며 삶의 빛과 희망을 더 많이 보여주고 이야기하고자 했다.


영국의 심리학자 볼비는 애도의 과정을 4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 단계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는 것, 두 번째 단계는 죽은 사람을 매우 그리워하고 집착하는 것, 세 번째 단계는 인생의 의미를 잃은 듯 절망하는 것, 마지막으로 상실의 통증을 이겨내고 현실로 복귀하는 회복의 단계이다.


사랑하는 두 분의 어른을 보낸 후 나는 이 애도의 과정 4단계를 건강하게 지나기 위해 노력했다. 나에게 4단계의 애도 과정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슬픔과 우울함에 빠져있기보다 그분들의 삶의 가치를 어떻게 내 삶에서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이번 아버님의 장례 이후에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준비해야 할지, 죽음이 삶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했다. 이제야 이십 대의 문턱을 넘은 나에게는 너무 이른 주 제지 않을까 싶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것은 삶의 의미를 아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고민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위해 내가 첫 번째로 고른 책은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암 병원 종양내과 전문의인 김범석 의사이다. 그가 만나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4기 암환자들로 완치 목적이 아닌 생명 연장의 목적으로 항암치료를 받는 이들이다. 이 책은 죽음 앞에 선 암 환자들과 가족들이 죽음이라는 것과 어떻게 만나고 대처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자, 한 의사가 환자의 죽음을 뒤로 미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삶과 죽음에 대하여 고민하는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어제는 우리의 오늘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오늘은 또 다른 이의 내일에 영향을 미친다. 삶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이 다른 이의 삶에 작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진 빚을 비로소 갚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전하는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 담아서 당신에게 바친다." p.8



- 내가 4개월 뒤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의사가 환자를 만날 때의 감정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도 공감해본 적도 없었다. 이 책에서는 종양 내과 의사가 환자를 만나는 다양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의사는 내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무거운 소식을 환자와 가족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폐암 진단입니다. 1년여의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신장암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항암치료를 다 해봤지만 이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아버님의 암덩어리 옆에 큰 혈관이 있는데 이게 시한폭탄과 같고 언제 혈관이 녹아서 터질지 모르는데 혈관이 터지면 즉사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매일 같이 해야 하는 직업. 삶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절망을 매일 같이 마주해야 하는 그의 마음은 대체 어떤 것일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환자의 암과 싸우지만 수 없이 죽어가야 하는 환자들과 만나야 할 때 절망하지 않고 어떻게 그 일을 지속할 수 있었던 걸까. 종종 교사라는 직업으로 학부모님께 전해야 하는 안 좋은 소식은 '오늘 아이가 활동을 하다가 다쳤어요.' , '아이가 친구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잘 해결해 나가도록 가정과 학교에서 도와야 할 것 같아요.', '아이의 마음이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가정에서는 어떤가요?' 정도이다. 이런 소식을 전할 때에도 마음이 무거워지는데, 종양 내과 의사의 어깨에 놓여 있는 짐의 크기는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그리고 그 소식을 듣는 환자와 가족들은 살아온 삶에 따라 모두 다른 반응을 보인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의사에게 이제 나는 죽으라는 거냐며, 의사가 할 소리냐며 언성을 높이고 분노를 쏟아내는 환자. 그 환자는 너무 열심히 살아와서 암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일을 놓지 못했다. 더 이상 몸이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를 때까지.. 그리고 평생 일에 미쳐 살아갔던 남편과 아버지를 두었던 가족들은 지친 모습으로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다.


 한 할머니 환자는 방사선 치료를 했는데 효과가 좋지 못하다는 의사의 말에 오히려 자신은 괜찮다며, 선생님이 잘 치료해주려고 이렇게 애썼는데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할머니는 치료 결과가 안 좋아서 항암제를 바꿔야 했던 순간에도 화를 내거나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으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딸과 1년 여의 시간을 깊이 함께하며 손주들을 등원시키고 매일 아침 사우나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까지 평범한 일상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일. 누구에게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





- 죽음 앞에서조차 열심히인 한국인의 모습


이 책을 읽으며 너무도 마음 아프지만 공감 가고 이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라는 주제의 이야기. 죽음 앞에서 조차 너무도 열심히인 한국인들의 모습이 애잔하고 아프게 다가온다.



그런 시대에서 "하면 된다"는 일종의 사회적 종교였고 우리는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관이었다. 우리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지 말이다. 심지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에 있어서도.


미국의 경우 암 환자들이 평균적으로 사망 6개월 전까지 항암 치료를 받았다. 즉 항암치료가 의미 없는 것으로 판단되면 남은 6개월은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갖고 호스피스 완화 의료를 받는 것이다.


곧바로 서울대병원에서는 사망한 환자 자료를 추리고 연구를 시작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마지막 항암치료와 사망까지의 평균적인 시간차는 60일, 두 달이었다. 죽기 두 달 전까지 항암치료에 매달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호스피스 완화 의료를 선택하는 사람은 전체의 10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다. 그것이 2007년 상황이었다. 10년 뒤 똑같은 연구를 다시 해보았다. 이번에는 마지막 항암치료와 사망까지의 간격이 30일로 줄었다. 죽기 한 달 전까지 항암치료를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그렇게 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p.227-228


죽음 앞에서까지 최선을 다하는 한국인들이라니. 너무 가슴 아팠다. 전쟁처럼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야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불안감. 그것이 슬픈 동력이 되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한국인들이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조차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항암 치료를 진행하는 한국인들. 누구를 위한 치료일까. 누구를 위한 최선일까. 우리는 언제까지 그렇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일까.


그 슬픈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가 책에 소개된다. 항암 치료를 마지막까지 진행하고 의식조차 없는 환자. 이미 그 치료를 받는 동안 그 할머니셨던 환자는 충분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인공호흡기를 끼고 버티고 있던 할머니의 이제 좀 쉬고 싶다며 멈추어버렸지만 가족들은 '심폐 소생술 거부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았고 의료 지는 멈춘 심장에 CPR(심폐소생술)을 해야 했다. 그것은 '쇼피알(환자는 가망이 없으나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CPR)'이었기에 제대로 할 필요가 없었으나 인턴 선생님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가족들의 요구대로 정석대로 CPR을 진행하였고 할머니의 흉부를 압박할 때마다 할머니의 갈비뼈는 뚝뚝 부서졌고 더 이상 부서질 갈비뼈조차 없어졌다. 가족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면 연극은 끝나고 주치의는 사망을 선고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환자의 마지막 길은 그렇게 힘들고 험난했다.


나는 이 일화를 보며 생각하게 된다. 죽음을 맞이하는 길에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이것이 할머니를 위한 것이었을까. 두 분의 장례를 치르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가족들의 마지막 최선이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족들의 죄책감을 지우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할머니를 위한 것인지는 우리는 돌아봐야 한다. 내가 할머니였다면 그렇게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다가온 죽음이라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지 않을까.


-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을까


우리는 누구도 나의 죽음이 언제 찾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때문에 대부분 죽음을 맞게 되는 사람들은 마지막을 준비하기는커녕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암 환자들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알게 된다. 내가 언제 죽을지 알게 된다는 것, 그것은 축복일까, 절망일까.


내가 만약 나에게 남은 시간을 알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나에게는 무리한 연명 의료나 희망 없는 치료는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내 삶이 나에게 허락한 시간만큼 살았다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는 삶을 마무리하고 싶으니까. 그리고 너무 많은 비용을 들여서 장례식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야겠다. 나에게 남은 재산이 있다면 이미 떠난 이의 장례식이 아닌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나의 장례식을 3일 동안 치르며 고생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 함께 모여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며 나의 삶을 추억하는 축제 같은 서클을 열어달라고 해야지. 나의 삶은 이미 행복하고 즐거운 축제였으니까. 나의 삶과 존재가 남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나누어 주고 들려달라고. 그리고 나의 유골은 화장해서 할 수 있다면 넓은 바다나 산에 올라가 바람에 흩날려주렴. 자유롭게 자연을 노닐 수 있도록. 나의 영혼은 천국에 가 있을 테니 너무 슬퍼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나를 더 자주 찾지 못해 죄책감도 갖지 말고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전해줘야지.


만약 나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1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남은 이들이 힘들지 않도록 내가 살아온 삶을 정리해가고 싶다.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나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버려야 할 것들은 후회 없이 버릴 것이다. 정리를 하며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이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했는지 지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반성도 해봐야지. 그리고 항상 열심히 성실히 살아오느라 지쳤을 나의 몸과 마음에게도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남은 1년은 공부하거나 일하지 않고 삶을 정리하는 몇 편의 편지와 글을 가족들, 그리고 내가 살아가며 사랑했던 이들에게 남겨야겠다. 나의 삶에 모든 순간 함께 해준 가족들, 남편, 친구들, 사랑하는 공동체에게. 개성도 강하고 자기주장도 강해 더 살피고 배려하지 못했음을 사과하고, 내가 삶의 모든 행복과 기쁨, 슬픔 아픔들을 그대들과 함께 경험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지. 더 많이 사랑하고 품어줘서 고마웠다고. 그리고 나의 마지막을 슬퍼하지 말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라고 이야기해줘야지.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라고. 눈물은 하루만 흘리고,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더 많이 누리며 살다 오라고. 약한 이들을 보살피고 나누며 예수님 말씀 기억하며 살아달라고.  


그렇게 1달 정도 정리가 끝나면 이제 단출한 짐을 들고 사랑하는 우리 땅의 국토를 여행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예배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사랑하는 남편과. 그리고 어느 날, 조용한 새벽 잠들듯이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고 싶다. 너무도 사랑했던 남편의 곁에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 다는 것.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삶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고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가장 생생히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나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는 다시 이 글을 찾아와야 겠다.




그들의 마지막은 언제나 나를 향해 묻는다. 언젠가 당신도 여기에 다다르게 될 텐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떤 모습으로 여기에 당도하고 싶은가? 나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고 다시 한번 생의 감각이 팽해진다. 어쩌면 죽음만큼이나 삶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음만 잊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삶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이 삶을 느끼지 않고 산다. 잘 들어보라. 삶을 잊은 당신에게 누군가는 계속 말을 걸어오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종착역에 당도한 이들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묻는다. 이제 남아 있는 우리가 삶으로서 대답할 차례다.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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