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아팠던 나의 친구들
- 왜 교사가 되셨나요?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묻는다.
왜 교사의 길을 선택하였는지.
더 많은 사람들은 물어보지도 않은 채 스스로 이 사회와 교사라는 직업에 대하여 가진 생각들로 나의 선택의 이유를 짐작하기도 한다.
“초등교사는 여자에게 제일 좋은 직업이지.”
“방학도 있고, 정년도 보장되고, 그런 직업이 어디 있어.”
“너는 이제 좋겠다. 안정적인 공무원이잖아.”
처음에는 저런 말들을 들으면 나를 잘 알지 못하면서 멋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무례함에 화가 나기도 했다. 이들에게 교직의 고충에 대한 나의 이야기의 대부분은 '배 부른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나는 여자라서 교사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 여자이기 때문에 이 직업이 나에게 적절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년이나 방학을 바라보고 이 직업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몇 마디 말로 담기엔 내게는 너무도 긴 이야기가 존재했으니까. 그리고 요즘은 그 말들 안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아픔’이 담겨있다고 생각하며 넘기기도 한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면 듣는 이의 마음도 배려하지 못한 채 저런 이야기들이 먼저 나오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면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교사라는 직업이 더 이상 사회의 존중과 존경을 받는 직업도 아니며, 노력에 따른 경제적인 보상이 따르는 직업도 아니다.
그리고 내가 끊임없이 연구하며, 아이들에게 쏟는 노력을 알아주는 직업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회복적 교육, 예술 치료, 토론 수업 등등 끊임없이 공부하는 나에게 너는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라고 의아해하며 묻기도 한다.
그 물음 속에는 ‘교사는 굳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잖아?’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나는 왜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했을까.
무엇이 나를 다시 학교로 이끌었을까.
-벽지가 스케치북이었던 아이, 그리고 엄마
이 이야기를 이어가려면 어린 시절로 잠시 돌아가야 한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나의 꿈은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나이의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나는 많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어린 나에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화가’가 정확이 무엇을 하는 직업인지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 속에는 ‘예술’이라는 것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그 안에서 너무도 행복해했던 어린 나의 모습이 있었다.
엄마가 500원이나 1000원의 용돈을 주면 보통 아이들은 슈퍼로 간다고 했다. 가서 맛있는 간식을 사곤 하는데, 나는 꼭 문구점에 갔다고 한다. 문구점에서 색종이, 찰흙, 스케치북 등 무엇인가 만들고 창조할 수 있는 재료들을 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재료들을 가지고 집에 돌아오면 이제 나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 시작된다. 엄마가 보기에는 이해할 수도 없는 나만의 작품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3시간이고 4시간이고 방구석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만들고 그것을 보여주면서 행복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나를 그 모습 그대로 이해해주었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의 벽지는 나에게는 그저 스케치북이었다. 집 안에 커다랗고 흰 벽이 나에게는 큰 스케치북으로 보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크레파스를 들고 그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빨강, 노랑, 초록 온갖 색깔들로 채우며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을 나는 누리곤 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성인이 되어 생각해보면 그것이 엄마 입장에서는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가 집을 잘 꾸며 놓아도 나는 그림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어른들의 눈에는 그저 지저분한 낙서로 보였을 벽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나를 혼낸 적이 없다. 오히려 어디선가 전지를 구해와서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벽에 하얀 종이를 붙여주곤 했다. 그렇게 종이를 덧대고 덧대며 나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해주었다. 지금 엄마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물어보면 엄마는 어린이들은 이렇게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면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틀을 싫어하는 아이
그렇게 조금 자란 아이는 유치원도 다니고 학교도 다녀야 했다. 가끔은 남들이 다 다니는 학원도 가야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다녀본 학원이 없었다. 피아노 학원에 가서 콩나물에 체크를 하면서 똑같은 연습을 10번씩 해야 하는 그 훈련이 나에게는 너무 답답했고 전혀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결국 어린 시절 나는 밥을 먹지 않고 피아노 학원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학원 원장님도 전화해 설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학 학원도 마찬가지였다. 2학년이었던 내가 수학 학원에 갔는데 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두 자릿수 뺄셈 문제였는데 보통의 학원들처럼 선행 학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내가 이해하기도 어렵고 재미도 없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또 수학 학원을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참 별난 아이였을 것이다. 가라는 학원 가서 공부하는 것이 그 시대 어린아이들에게는 당연했을 텐데.. 뭐 하나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 아이였으니. 하지만 엄마는 그런 나를 혼내지도 않고 그저 조금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이해하셨고 나는 그렇게 조금은 자유롭고 해방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 내가 만난 학교, 그리고 아파하는 친구들
하지만 이런 나도 학교는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며 나에게 학교들은 너무도 네모난 모습이었고, 규칙과 규범이 가득했으며, 교육이 정말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던 것 같다. 내가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교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중학교 시절의 일화가 있다. 미술 시간은 학교 수업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때 만난 미술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주신 주제대로 그림을 그렸다. 아마 풍경화였던 것 같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그림을 들고 5명씩 번호대로 교실 앞에 나와 서 있으라고 하셨다. 뭐하시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가지고 있는 펜으로 앞에 서있는 우리들의 그림에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A, B, C, D…. 그렇게 매 시간 나의 작품에는 점수가 매겨졌다. 가장 자유롭고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예술이 알파벳 숫자 하나로 평가받게 되던 그 순간. 그곳에서는 누구도 나의 그림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았으며, 내가 무엇을 그리고자 한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곳에서 예술은 점수로 채점되어야 할 기술의 영역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그림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당연히 화가라는 꿈은 더 이상 꾸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사회 속에서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이후 중, 고등학교 시절은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시간이었다. 나와 세상에 대해서 계속 질문을 하고는 했다. 나의 눈으로 바라보는 중학교는 조금 이상했다. 우리는 귀밑 3cm로 머리를 잘라야 했으며, 당시 존재했던 학생부 선생님들은 교문 앞에서 우리들의 복장이나 머리 길이, 화장을 했는지 등을 단속했다. 선도부가 길게 줄을 선 그곳을 아침마다 지나오는 그 기분은 참 이상했다. 그리고 학교의 수업도 점점 지식 위주의 수업이 주를 이루게 되고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우리 반 교실에서는 수업이 시작되면 엎드려 잠을 청하던 친구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 친구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행해지는 이 교육이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초등학교 시절 밝게 지내던 친구들도 점점 눈빛의 빛을 잃어가고 왜 점차 회색빛이 되어가는 것일까? 그것이 저 친구만의 문제 일까? 우리 친구들의 문제일까?
이 질문이 한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점점 우리에게서 질문을 빼앗아가는 이 학교. 친구들이 아닌 이 학교와 교육이 잘못된 것 일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 엎드려 자던 친구는 종례가 끝나면 가장 밝은 표정으로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학교 밖을 빠져나가곤 했으니까.
많이 답답했지만 나는 그때 철학과 교육에 대한 책들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공부와 고민들을 통해서 이 구조를 변화시키는 존재로 성장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 같다. 공부도 최선을 다해서 했다. 내가 그 구조 속에 들어가야 작은 변화라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될 테니까. 입시 지옥이라고 불리는 고등학교 3년은 나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 아침 7: 30부터 밤 11:30까지 다른 생각 할 틈 없이 공부만 해야 했던 3년.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실패할까 봐 매일 불안했던 시간들. 밤이 되어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서 MP3에 담긴 ccm을 들으며 많은 시간 눈물짓던 시간들. 사회의 틀과 우리들에게 가하는 압박은 너무나도 견고했지만 누군가는 그 틀을 흔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수능 성적을 비관해 자살을 했던 뉴스를 종종 듣곤 했다. 전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일이었고 내 친구들의 일이었다. 그런 뉴스들은 힘든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던 나의 마음에도 큰 상처를 입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당연히 나는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공부와 성적에 대한 압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사회와 부모가 한 팀인 것처럼 보였다. 그 당시는 대학에 나와야 좋은 대학에 나와야 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나는 듣지 않는 세상에 질문했다.
‘성적이 대체 무엇인가요?’
‘숫자로 표시되는 그 성적이 우리의 존재보다 더 중요한가요?’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한 어린 시절을 잃고, 삶에 대해 고민과 질문조차 할 수 없었던 우리의 삶이 정말 행복해지나요?’
‘우리가 청소년 시기에 고민하고 알아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요?’
‘삶에서 누려야 할 행복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경험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공부가 끝난 금요일 저녁이면 집 근처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곤 했다. 이 나라에 죽어가고 있는 나의 친구들을 위해. 이 나라의 교육이 아이들의 내면을 살리는 행복한 교육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했고 그리고 그 마음으로 공부를 했었다.
결국 나는 교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수학 성적이 부족해서 교대에 입학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당시 교대에서 입학사정관 제도를 처음 도입한 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나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1박 2일 동안 함께 합숙을 하며 심층 면접, 집단 토론, 논술 등을 보았다. 책을 많이 읽고 교육에 대해 고민을 해왔고, 학교에서 선생님과 함께 철학 토론, 논술 수업을 3년간 해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과정을 통과할 수 있었다.
- 그래서 내가 교사가 된 이유는
그리고 나는 교사가 되었다. 아이들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내가 있는 지역에 한정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감사하게도 지금의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아졌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아졌다.
아마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가 좋은 대학에 나오는 것이, 많은 공부를 하는 것이 꼭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종종 그렇지 않은 부모님들도 만나게 된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인데도 집에서 30분도 쉬지 못한다는 아이.
엄마는 나에게 공부하라는 이야기 말고는 하지 않는다는 아이.
수업 시간에 집에 있는 것이 너무 힘들고 차라리 학교가 더 행복하다고 눈물짓는 아이.
그런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내가 왜 교사가 되었는지 다시 기억하려고, 그리고 내가 도울 수 있는 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부모님과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 마음에 대해 공감하며 현재 상황에 대해 소통하고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상담을 이어간다.
그래서 나는 항상 공부를 한다.
‘회복적 생활 교육, 비폭력 대화, 예술치료, 트라우마, 교실 놀이, 삶을 살리는 토론 수업….’
아이들의 내면이 치유되는 교실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언제나 '아이들'이었고 모든 동기는 '아이들'에게서 나왔다.
아이들이 행복한 교실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내가 학교에 있는 이유니까.
그리고 우리 교실을 넘어 내가 만나는 선생님들이 내면이 회복되도록 돕고
함께 행복한 교실을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
학교에서 항상 선생님들과 서클을 열며 회복적 교육 연구 모임을 가지는 이유이다.
계속 단절되어가고 희망을 볼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공교육이지만
나는 이 공교육 속에서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며 다시 희망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사실 내가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희망’ 그 자체이다.
살아있는 존재들. 순수한 영혼들.
그 아이들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고, 선생님들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도 길게 썼지만 한 줄로 줄여보면
‘아이들이 행복한 교실을 만들어 가는 것. 아이들의 내면이 회복되는 교실을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내가 교사가 된 이유이다.
* 여울샘의 회복의 시선 브런치를 구독해서 교실 속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길에 함께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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