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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돌 Jun 05. 2024

'실패'라는 익숙한 맛에 대하여

두 번째 브런치스토리 작가 신청 실패를 회고하며






두 번째 브런치스토리 작가 신청 실패를 회고하며

by 여울돌(화목) May 30. 2024


초등학교 시절 나는 학급임원에 꾸준하게 출마했다.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싶은 마음으로 누군가 나를 추천하면 그대로 출마했고, 추천을 받지 못하면 내가 당당하게 손을 들고 출마했다.


인기가 많은 학우는 아니었던 탓에 번번이 낙마했던 경험이 있다. 5학년까지 받았던 최대 표가 6표? 남짓이었던 것을 기억하지만, 어렴풋이 스치는 기억에 내가 나를 뽑았으니 나를 밀어준 친구는 5명쯤 되겠노라 짐작했을 뿐이다.


6학년, 여느 해와 같이 도전했고 회장에 너무 유력한 후보가 있어 부회장에 도전했다. 역시 많은 후보가 출마했고 상위 2명만 남겨 재투표를 진행했다. 이번에는 여느 때와 달리 최종 2인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결과는 16대 14로 나의 승리! 부회장이었지만, 첫 학급 임원 당선에 나는 뛸 듯이 기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과 행복한 한 해를 보냈다.


그 뒤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학급임원 및 학생회, 전교임원을 경험했고,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끊임없이 도전했던 이 경험은 삶에서 좋은 자양분이 되어 다양한 사람과 함께 일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학교폭력을 당한 경험도 있던 작은 아이가 처음 실패를 겪었으나 극복했던 첫 번째 사건이다.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과 그 해 겨울방학을 너무 행복하게 보낸 탓에 선행 학습을 하지 않고 학교에 갔다. 학생회장 가산점과 내신 성적을 취득하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던 중학교 시절, 전교 50등쯤 되는 백분율을 뒤로하고 처음 마주한 수학 점수는 40점이었다.


"30점과 40점의 차이가 뭔지 알아? 30점은 조금 알고 나머진 찍은 애들, 40점은 그래도 기본은 하려고 노력한 애들이야." 수학 선생님이 수업 중 절망하는 나를 격려해 주시기 위해 말씀하셨다.


40점.. 40점.. 40점.. 내신 등급은 6등급이 나왔고, 420명 중 256등이라는 성적을 받았다. 그날로 학원을 등록해 레벨테스트를 본 결과, 중학교 1학년 수학도 제대로 모른다는 결과가 나왔다. 고향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나는 중학교 1학년 문제집을 고등학교 1학년에 다시 풀기 시작한다.


'수력충전', 나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문제집 이름이었다. 일차함수, 이차함수, 2차 방정식. 고1 2학기 기말고사가 되기 전 나는 모든 중학교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 기말고사 점수는 아직도 기억난다. 67점

4등급, 약 150등.


고등학교 2학년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수학의 기초를 알려주셨던 학원을 떠나 더 독하게 매달렸다. 새벽 2시까지 수학을 풀고 점심시간에도 수학 문제집을 계속 풀었다. 친구들은 쟤는 수학만 한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매달렸다. 그렇게 본 고2 미적분1 첫 시험 점수가 나왔다. 85점, 2등급. 기적이 일어났다.


그 뒤 상승곡선을 꾸준히 그려 고3 내신 수학시험에서는 96점을 받고 전교 9등을 기록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문과 210명 중 8명까지 1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 6등급에서 시작한 레이스는 최종 성적 2등급으로 마무리했다.


문제를 물어보는 친구에서 가르쳐주는 친구로, 공부 못하는 친구에서 공부 좀 하는 친구로. 다양한 변화가 있었지만 그런 것보다 가장 중요하게 깨달은 한 가지는 결국 공부는 성공경험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100만큼 노력했을 때, 70 정도의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100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해냈을 때 100은 나도 모르게 110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성적으로 많은 것이 갈라지는 대한민국 고등학교에서 맛본 실패를 작은 성공으로 극복했던 두 번째 사건이다.






고3, 대학입시에 실패했다. 앞서 소개했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올라간 내신 성적을 근거로 지원했던 대학에서 모두 떨어졌다. 수학점수는 드라마틱하게 올랐어도 다른 점수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탓일까, 그해에 지방국립거점대학이 유독 인기가 많았던 탓일까. 문제의 원인을 분석해 봤자 바뀌지 않는 것은 내가 희망하던 대학에, 또 교사라는 꿈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시 발표 날이면 교과 선생님들이 교실 앞 문을 열고 결과를 여쭤보셨다.


드르륵, 탁! "화목아 이번 OO대학교 결과는?"

"하하하..안됐어요..."

"아깝다.." 드르륵, 탁!


안타까운 표정으로 문을 닫는 선생님이 몇 번이고 찾아오셨을 때,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재수할까? 아니야 자신 없어. 유난히 길고 더웠던 '그 여름'을 어떻게 또 보내?" 스스로 되뇌었다.

친구들은 내가 재수하지 않는 결정에 대해 미쳤다고 뜯어말렸다. 하지만 나는 나를 알았고, 수험 생활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졸업식날까지도 대학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졸업식 다음 날 명지전문대학 청소년교육복지과(현 청소년교육상담과)에 합격했다는 알림을 받았을 때 소파 위에 누워있는 내 얼굴 위로 눈물이 흘렀다.

그 뒤 몇 개의 대학에서 추가로 연락이 왔지만, 청소년이라는 이름 하나를 보고 명지전문대학을 선택했다.


20살 2월, 대학교 O.T를 하는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 일이 천직이다! 학교 밖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청소년지도사를 해야겠다."


'청소년지도사'라는 꿈의 서막이었다. 그렇게 학부에서 4년 공부한 뒤, 지금은 현직 청소년지도사로 근무하며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세상이 무너짐을 느꼈을 때도 길이 있음을 이야기하곤 한다.


19살, 세상이 무너짐을 느끼던 소년이 실패를 극복한 세 번째 사건이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삶의 풍파가 올 때, 실패를 성공으로 극복하며 살고 있다. 단 시간에 눈에 보이는 성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좋겠지만, 내 삶은 그와 거리가 있었기에 받아들이고 정진하기 위해 노력한다.


수많은 실패가 쌓여 청소년을 만날 때 도움이 된다. 또래관계에 대한 고민, 간절하게 공부해 본 경험, 다양한 분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 경험 등은 그들과 가장 가까운 세대라는 강점과 만나 시너지를 내며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한다.


내게 브런치작가도 이와 같다. 비록, 작가 신청탭이 집요하게 눈에 보여 클릭할 때마다 떨어진 날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마음을 후벼 판다고 해도, 언젠가 이 순간마저 추억하거나 잊어버릴 것이라 생각한다.


삶은 이뤄가는 맛이 있다. 지금 당장 실패해도 지나고 나면 현재의 고난과 힘듦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수 있기에. 그렇게 오늘을 웃을 수 있고, 과거를 회상하며 힘을 얻어 미래를 구상한다.


내게 '실패'란 익숙한 맛이다. 하지만 '성공'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만약 당신이 실패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마저 지나갈 것이라 응원한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건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 하나가 아니던가?


함께 읊조려보자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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