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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Yeouul Nov 21. 2022

소주 박스만큼 편하고 아늑한 게 없지

집에 고양이가 숨을 곳이 없어서 박스를 갖다 놨는데...

친구가 일주일 동안 집을 비워서 친구가 키우는 고양이 이비를 나에게 맡겼다. 친구가 캣타워와 이비 집 등 이것저것 이비 물건을 챙겨 오긴 했는데 일주일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기에 많이 가져오진 않았다.



이비가 처음 우리 집에 온 날 깨달은 사실이 있다. 우리 집은 고양이에게 아주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다. 숨을 곳이 전혀 없다. 남편과 나 둘이 사는 이 집에는 가구가 많지 않다. 현재 호주에 사는 나는 렌트가 끝나면 이사를 할 수도 있어서 웬만하면 가구나 물건을 많이 안 사려고 노력한다.







침실에는 프레임 없이 매트리스만 있고 낮은 선반과 텔레비전이 있다. 거실에는 큰 6인용 식탁이 거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고양이가 숨는 곳은 주로 침대나 소파 밑인데 우리 집에는 침대 프레임도 없고 소파도 없어서 딱히 고양이가 숨을 만한 곳이 없다.



처음에 우리 집에 온 날 어디에 숨어야 하는지 방황하는 이비를 보니 나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 집에는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모두 다 노출된 공간뿐이었다.







다음 날 남편과 나는 임시방편으로 창고에서 박스를 가져왔다. 호주에서는 주로 팬트리나 창고에 물건을 박스째로 사서 쌓아두곤 한다. 한인 마트도 가깝지 않기에 소주도 그냥 박스째로 사놓는다. 다행히 창고에 콜라와 소주가 있었고 우리는 박스를 비워서 집에 가져왔다.



콜라 박스는 거실에 두고 소주 박스는 침실 구석에 두었다. 처음엔 별 관심 없는 듯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이비가 소주 박스에서 자고 있었다. 밥을 먹으러 잠시 나왔다가도 다시 침실에 있는 소주 박스로 가서 잠을 잤다.







소주 박스 안에 들어 가 있는 이비가 신기해서 계속 관찰했다. 굉장히 편해 보였다. 머리와 팔을 쭉 늘어뜨려 박스 밖으로 삐져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편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원래 고양이는 박스에 환장한다고 한다. 좋은 장난감이고 집이고 사줘도 이상하게 별것도 아닌 것에 관심을 두는 게 고양이이다. 그래서 고양이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소주 박스마저 좋아하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는 고양이의 매력에 푹 빠지고 있다.







비록 짧은 일주일이지만 그래도 이비의 작은 안식처를 만들어 준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박스를 전부 버리지 말 것 그랬다. 이비가 온다고 집을 청소하며 박스를 전부 다 갖다 버렸다. 고양이를 키우지 않으니 미리 생각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우리 집이 고양이에겐 그다지 적합한 구조는 아니지만 이비가 일주일 동안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냄새를 맡고 넓게 펼쳐진 바깥 풍경도 구경하고 나름 재밌게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느끼는 바지만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이비를 볼 때와 우리 집에서 이비가 지내는 모습은 확연히 다르다. 이전에 친구네 집에서 보지 못했던 이비의 모습을 발견하고 고양이의 세계에 점점 매료되고 있다. 소주 박스마저 좋아하는 이비의 귀여운 모습을 종일 볼 수 있고 참 알다가도 모르겠는 고양이의 매력에 푹 빠지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여울(Yeouul)

<빈티지의 위안>, <멜버른의 위안> 저자


Instagram: @yeouulart@yeouul_illustrator

Youtube: 여울아트(Yeouul Art)여울여울

Website: https://yeouul.creatorlin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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