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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Yeouul Mar 03. 2023

호주에서 삶이 여유롭게 느껴지는 이유(대학 생활 편)

지난 글에서는 다사다난했던 호주 대학 입학 과정을 이야기했다. 지루하고 진부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호주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궁금할 수 있어 어렵고 힘들었다고 말만 던져놓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안 하고 넘어갈 순 없었다.


어찌 됐든 식음 전폐하며 입학한 대학 생활이 그리 순탄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서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일을 찾았기 때문에 좋은 경험이었다. 수면 부족에 시달렸고 매번 실수를 거듭하며 능력 한계에 부딪혔고 그렇게 성장하여 좋은 결말에 도달했으니 내 삶에서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자기 행복에 초점을 맞춰보자.
그 감정을 앞세우고 집중한다면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



호주 대학 시스템은 한국과는 다르다. 내가 공부한 과정만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나는 호주 멜버른에 있는 RMIT 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으로 전문 학사 학위(Associate Degree)를 2년 공부하고 졸업하였다. 그리고 나름 우수한 성적을 받아 바로 디지털 미디어학과 3학년으로 편입하여 1년 더 공부하고 학사로 졸업하였다. 참고로 호주 대학은 기본 3년 과정이다.





나는 한국에서 대학교를 3학년 1학기까지 마친 후 자퇴하고 호주에 왔다. 한국 대학과는 확연히 다른 호주 대학 생활에 놀랐던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벅찬 호주 대학 생활에서 내가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 두 가지를 말해보겠다.


일단 첫 번째로는 호주 대학 수업 과정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대학교에서 컴퓨터 학원처럼 동그라미와 네모 그리기부터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거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그랬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호주 대학교에서 첫 수업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선과 동그라미 그리기, 도형에 색 넣기, 파일 저장하기 등 너무나도 기초적인 걸 컴퓨터 학원처럼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게 뭐 하는 건가 했다. 그런데 서양화를 공부했던 나는 디자인 프로그램을 다룰 줄 몰랐기에 이렇게 기초부터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것에 너무 감사할 따름이었다.





처음에 2~3주는 이렇게 기본 툴만 배웠다. 이후 배운 걸 토대로 간단한 디자인 작업을 하였다. 마음 졸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같은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스타일만 다를 뿐 우리는 배운 기능을 바탕으로 저마다 특색 있는 디자인을 하였다. 누군가 확 튀게 화려한 기술을 사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학교에서는 컴퓨터 학원처럼 프로그램 기능도 하나하나 다 알려주고 찬찬히 수업을 밟아 갔기 때문에 학점의 결과는 자기 능력을 탓하긴 보단 게으름을 탓해야 했다.


처음 2~3주만 여유로웠고, 그다음부터는 말도 안 되는 양의 과제로 거의 매일 밤을 지새워야 했다. 2년 동안 수업 중에 안 예민한 친구가 없을 정도로 우리는 모두 과제에 치이고 힘들어했다. 오죽했으면 2학년이 되었을 때 많은 학생이 자퇴하고 휴학하여 그래픽 디자인과 인원이 25%나 감축되었다.





이렇게 정신없고 힘든 대학 과정임에도 내가 여유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면 됐기 때문이다. 이 말을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건 나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인지하고 있다는 거다. 미흡한 컴퓨터 능력에 자괴감을 느끼고 기술에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차별화된 나만의 디자인을 만들지에만 집중하였다.



누구에게나 모두 시기가 있고 타이밍이 있다.
나는 호주 대학교에서 깨달음을 얻었지만
누군가는 고등학교 때 이미 느꼈을 수 있고
누군가는 직장에서 배울 수 있고
누군가는 연애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어떤 작품을 내세워도 누구보다 잘했네! 못 했네! 평가하지 않았다. 비교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오직 나에게만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수업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1학년 1학기에 2주 동안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Adobe Illustrator)의 기본 툴을 배운 다음 애플, 미쓰비시 같은 비교적 단순한 로고 따라 그리기를 하였다. 너무나 유명한 브랜드 로고이지만 이렇게 2주 배운 나도 따라 그릴 수 있다는 걸 보고 깨달았다. 중요한 건 프로그램을 다루는 능력이 아닌 이걸 생각해 내기까지 얼마나 고뇌했느냐이다.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건
나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인지하고 있다는 거다.



이걸 깨닫고 나서 나에게 쓸데없는 고민과 신경을 모두 다 버렸다. 이렇게 잡다한 생각을 거둬내고 나니 중요한 것에 더 몰두할 수 있었고 작업을 끝내고 나면 편히 쉴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공간도 생겼다.


한국에서는 일을 마무리하면 그다음 일을 생각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쉬면 죄책감이 들었다. 쉬지 않고 열심히 해도 잘 될까 말까 인데 나에게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자책하였다. 그런데 호주 대학교에 다닐 때는 집중한 일을 끝내면 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나니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쉴 수 있었다.





내가 호주에서 삶의 여유를 느낀 두 번째 이유는 학교에 후줄근하게 오는 친구들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 대학교에 다닐 때 옷이나 화장에 신경을 썼었다. 매일 꾸민 건 아니었지만 민낯에 운동복을 입고 다니진 않았다. 한국 대학생과 비교하면 호주 대학생들은 덜 꾸미고 다닌다.


편한 복장에 민낯으로 학교에 오는 친구들이 많았다. 가방이 오래되고 낡아도 그냥 들고 다니며 심지어 교실 바닥에 둔다. 이런 문화를 잘 몰랐던 나는 대학 생활 초반에 친구에게 바닥에 가방이 떨어졌다며 주워서 건네주었다. 친구는 웃으며 괜찮다고 하고 다시 가방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나중에 친해져서 친구들 인스타에 들어가 보니 파티에서는 거의 시상식 같은 메이크업을 하고 의상을 입는다. 꾸밀 땐 제대로 꾸미고 평상시에는 외모 치장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회사에서는 또 다르다.





첫 등교할 때 나는 화장도 하고 옷도 신경 쓰고 갔는데 친구들은 운동복이나 정말 편한 복장으로 학교에 왔다. 그러다 보니 다음부터는 나도 거의 민낯에 아무거나 입고 편하게 학교에 갔다. 귀찮아서 전날 입은 옷을 다음 날 입는 날도 많았다. 아무도 내가 뭘 입었는지 화장을 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꾸미는 데 돈과 시간을 덜 쓰게 되고 학교 가는 마음도 가벼워져 아침에 여유 시간도 생겼다.


지난 글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호주에 살면 주변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화장을 하든 내가 생각하기에 괜찮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마음대로 지내다가 한국에 가면 옷은 왜 이러냐는 둥 화장은 왜 이러냐는 둥 평가를 받았다.


그러면 유튜브와 블로그로 최신 유행을 열심히 찾아본 후 사람들의 시선에 맞춰 살다가 다시 호주로 돌아오면 또 내 멋대로 살다가 한국에 가면 또 지적받고 반복이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나만의 타협점을 찾은 상태이다. 이렇게 잡다한 신경을 버리고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에 마음에 여유 공간이 생길 수 있었다.





호주 대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으면 현재의 나는 형편없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에게 너무 많은 가르침이 있었던 시기이다. 현재 호주에 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이 배움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호주 대학교에 가야만 깨닫는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모두 시기가 있고 타이밍이 있다. 나는 호주 대학교에서 깨달음을 얻었지만 누군가는 고등학교 때 이미 느꼈을 수 있고 누군가는 직장에서 배울 수 있고 누군가는 연애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


'이건 반드시 해야 해.'라는 건 없다. 각자에게 맞는 방법과 방식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얻고자 하는 걸 끊임없이 연구하다 보면 나만의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대신 여기서 중요한 건 나의 행복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적당한 전문직을 가지면 삶이 안정적이어서 행복할 것 같아."


"집을 사면 마음이 편안해서 행복할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하기보단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이 전문직을 갖고 싶어."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를 편안하게 해 줄 이 집을 마련하고 싶어."



항상 행복이 앞서야 한다. 무언가 이루면 행복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뒤에 놓으면 안 된다. 자기 행복에 초점을 맞춰보자. 그 감정을 앞세우고 집중한다면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


사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모든 여유로운 마음이 무너지고 다시 바쁘게 살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마음가짐은 본인 하기에 달려 있다고 하지만 환경도 중요하다. 한순간에 모든 게 바뀌진 않더라도 내가 호주에서 배운 이 삶의 여유를 주변과 나누며 행복하게 현재를 즐기며 살고 싶다.






일러스트레이터 여울(Yeouul)

<빈티지의 위안>, <멜버른의 위안>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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