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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Yeouul Mar 01. 2023

결혼식 대신 결혼기념일마다 셀프로 촬영하면서 남겨요

그저 행복하게 잘 살기만 하면 뭐가 후회될까 싶다.

우리는 코로나가 시작되고 어수선했던 2020년 초에 결혼했다. 벌써 올해가 결혼 3주년이다.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원래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내 뜻이 부모님과 시댁의 의견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는지 갑작스럽게 터진 코로나로 우리는 결혼식 없이 혼인신고만 하고 재빨리 호주로 떠났다.



시간이 지나 언젠가는 결혼식을
하지 않은 걸 후회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생각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저 행복하게 잘 살기만 하면
뭐가 후회될까 싶다.



2020년 2월 초까지 우리나라는 코로나부터 비교적 안전했다. 그런데 2월 말 신천지 사건이 터지면서 급속도로 전국에 코로나가 확산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하나둘 국경을 닫는 나라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와 남편은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와 공부하며 보낸 시간이 길었다. 결혼을 결심하며 호주에서 정착하기로 마음먹었고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천천히 호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코로나는 심각해졌고 아버지께서는 호주에 가서 살 생각이면 빨리 정리하고 호주로 들어가기를 권유하였다. 이대로라면 호주 국경이 닫혀서 우리가 호주에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번개로 상견례를 하고 당일에 바로 3일 뒤 호주로 떠나는 비행기를 끊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식 없이 혼인신고만 하고 호주로 왔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맞았다. 우리가 호주에 도착하고 일주일 뒤쯤 호주 국경은 굳건히 닫혀 2년 뒤인 2022년이 되어서야 다시 열렸다. 만약 아버지의 빠른 판단이 없었다면 우리는 호주 국경이 닫혀 한국에 정착하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물론 한국이 싫어서 도망친 건 아니지만 20대 이후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호주여서 우리가 결혼해서 다시 시작하기에는 더 나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잘 설득해서 결혼식을 안 할 수 있을까 궁리하며 살았는데 코로나가 도와줬다. 이건 단순히 내 생각이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성대한 결혼식도 좋지만 이렇게 한 번에 모든 걸 쏟아내기보다는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이 고생을 나눠서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물론, 이건 나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거다.





나는 촬영이 능숙하며 포토샵으로 사진 편집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성향 자체가 비싸고 대단한 것보다는 소소한 추억을 더 좋아한다. 뭔가 판을 깔아주면 힘들기만 하고 그 기억이 오래가지 않는 타입이다. 굳이 사서 고생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의 첫 촬영은 호주 해변과 등대 앞에서 찍은 웨딩 사진이다. 사진을 보면 파란 하늘에 날씨가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 드레스를 입고 차에서 좌절하며 비가 그치기를 멍하게 기다렸다.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솔직히 이때 이후로 다시는 셀프 촬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 돈 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더 깨달았다.





우리는 매년 결혼기념일 날 여행을 간다. 괜찮은 숙소를 예약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한적한 곳에서 멍 때리며 쉰다. 2주년 때는 빈티지한 숙소를 예약했는데 실내 인테리어가 독특했다. 여기서 개화기 의상 콘셉트로 촬영하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빈티지를 좋아하는 나는 이와 어울리는 옷이 꽤 많았다. 추가로 필요한 소품은 중고 샵에서 저렴하게 구매하였다.


한번 셀프 촬영을 해봐서인지 이번에는 제법 프로페셔널했다. 1시간 내로 4벌의 옷을 빠르게 갈아입고 장소도 바꿔가며 재빨리 촬영을 끝냈다. 이렇게 해보니 또 셀프 촬영이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3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농장으로 여행을 갔다. 숙소는 독채였고 앞에는 강이 흐르고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리는 아주 조용한 곳이었다. 농장 분위기에 맞게 이번에는 시골 소년 소녀의 콘셉트로 촬영하기로 했다.


사진으로 보면 날씨가 화창하고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34도가 넘는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정한 콘셉트가 있었기에 우리의 몸을 다 감싼 옷을 입고 34도의 기온을 버티며 촬영했다. 날씨가 얼마나 더웠으면 촬영하다가 더운 날씨를 버티지 못해 핸드폰이 계속 마비되어 켜지지 않았다. 숙소에서 열을 식힌 후 핸드폰이 정상으로 작동할 때까지 기다리고 촬영하는 걸 반복했다.





숙소 근처에는 촬영하기 좋은 곳이 너무 많았다. 날씨가 좋았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더 많이 찍을 수 있었을 텐데 도저히 걸어 다닐 수 없는 날씨였다.


사실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매년 셀프로 촬영하며 남길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래도 매년 달라지는 우리의 모습을 기념하며 촬영하는 게 재밌고 기억에 많이 남는다.





결혼식을 하지 않은 거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성대하든 작든 식을 올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방법만 다를 뿐이지 나도 그 마음은 비슷하다.


나는 항상 무엇을 하고 싶은지보다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한다.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와 연결 짓는다. 결혼 또한 이와 비슷했다. 나에게 결혼은 결혼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단 결혼 이후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결혼하고 잘 살 수 있을지 너무 많은 고민을 하다 보니 결혼식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뇌는 한정적이어서 고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여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민에만 몰두하였다.





시간이 지나 언젠가는 결혼식을 하지 않은 걸 후회할 수도 있다. 이건 아무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10년 뒤 20년 뒤의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뭐든 정답은 없다. 그래도 이 생각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저 행복하게 잘 살기만 하면 뭐가 후회될까 싶다.





일러스트레이터 여울(Yeouul)

<빈티지의 위안>, <멜버른의 위안> 저자


Instagram: @yeouulart@yeouul_illustrator

Youtube: 여놀자(yeonolja)ㅣ 여울여울

Website: https://yeouul.creatorlin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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