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영원한 나의 편, 나의 어머니
10. 영원한 나의 편, 나의 어머니
"왜 자꾸 춥다고 해?"
"..."
"네가 춥다고 할 때마다 걱정돼서 죽겠어 아주.!"
수화기 너머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지만 그 안엔 걱정이 한가득 서려있었다. 매년 춥다, 는 말을 달고 살던 나지만 올해는 부쩍 추워진 날씨에 나 스스로 체감하는 추위가 더 심해졌다. 11월 초부터 패딩을, 그것도 롱 패딩을 꾸역꾸역 입고 다니는 내 모습이 엄마 눈에도 걱정으로 비쳤던 것이다.
이제 결혼까지 했고, 언젠간 아기도 가질 건데 몸이 약한 건 아닌지 엄마는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결국, 엄마는 인삼을 사서 몇 날 며칠을 다려 홍삼을 만들어왔다.
"대박."
물통에 가득 담긴 홍삼즙을 보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놀란 나를 보며 엄마는 말을 덧 부쳤다.
"집에 더 있어. 많아. 정 서방이랑 같이 매일 꼭꼭 챙겨 먹어."
엄마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맛이 좋은 음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마 정성이 생각나 매일 아침으로 전자레인지에 데워 남편과 함께 마셨다. 홍삼이 써서 나는 꼭 꿀을 넣어 먹었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타지 않고 잘 마셨다.
며칠 전 남편이 회사 워크숍 때문에 엄마가 1박 2일 우리 집에 머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도 홍삼을 잊지 않고 들고 왔다. 더불어 추위에 좋다는 생강청까지 만들어 왔다. 쓴 것을 싫어하는 나에게 생강청은 정말 먹기 싫은 음식이었다. 그걸 눈치챈 엄마는 내 등짝을 때리며 약이라고 꼭 참고 먹으라고 혼냈다.
입술이 삐쭉 내밀어지려던 찰나에 엄마는 장바구니에 바리바리 싸온 음식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 집인 듯 익숙하게 앞치마를 메고 요리를 했다. '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는데, 아빠가 요새 집에서 저녁도 안 먹고 해서 혼자 먹기 싫었는데 잘 됐다', '너랑 같이 먹게 돼서 너무 좋다.' 신이 난 듯한 목소리로 말이다.
근데 그 뒷모습을 보니 왜 그렇게 마음이 찡했을까. 내 집에 오면 그저 푹 쉬었으면 좋겠는데 우리 엄마는 그러질 못한다. 요리부터 집안 상황까지 꼼꼼히 살펴보며 필요한 게 없는지, 자신이 해줄 건 없는지 찾기 바쁘다.
"딸 가진 엄마들은 싱크대 앞에서 죽는다더라."
신혼집 입주하는 날이었나. 싱크대에서 음식을 하던 엄마가 우스갯소리로 한 그 말이 생각났다.
엄마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엄마가 좋아하는 프로, 연애의 맛을 보았다. 깔깔 웃으면서 재밌게 보다가 함소원이 돈에 대해 집착하게 된 이야기가 나온 순간이었다. 엄마가 점차 그 프로를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
함소원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하면서 의사가 '정작 자신에게 돈을 못 쓰고 있지 않냐.'라는 물음에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도 저런데."
엄마의 그 말이 가슴에 쿡 하고 박혔다. 그리고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아는 엄마는 그렇기 때문이다. 가끔 사고 싶은 옷, 가방이 생겨도 엄마는 집에 옷 많아, 가방 있어, 신발 있어. 라며 사고 싶은 마음을 한번 꾹 누른다. 그러다가도 꼭 사고 싶어 지면 그중에서도 가장 싼 것을 골라서 구매한다.
그런데 자식에게는 다르다. 내가 결혼할 때 엄마는 뭐든 다 해주고 싶어 했고 다 해주려고 했다.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찾아보며 이것저것 사주기 바빴다. 사주는 물건들이 많아질 때마다 내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홍삼을 볼 때마다, 생강청을 볼 때마다 엄마가 생각난다. 시린 겨울을 견디게 해 줄 따뜻한 음식들처럼 엄마는 영원한 내 편이고 나를 포근히 감싸준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엄마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이젠 엄마도 엄마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고스란히 지나온 엄마도, 나처럼 예쁜 거 사 입고 싶고, 맛있는 거 먹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자식이 생기고부터 엄마는 '여자'이기보다, '엄마'이기를 선택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청춘을 먹고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엄마의 인생을 먹고 자라긴 싫다. 속된 말로 우리 엄마는 싱크대 앞에서 죽는 엄마가 아녔으면 좋겠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