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른아이 Jun 18. 2020

소년이 온다

한강 作





요 근래 내가 읽은 책들을 살펴보면 90%는 서평제의가 들어온 책이었다. 제일 처음 서평을 쓰게 된 계기가 "책 읽는 즐거움"과 "그 책을 읽고 난 내 생각을 자유로이 서술하는 행복"이었는데 좋아서 시작한 일이 일이 되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마감 날짜 내에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 꼴이었다. 마치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것 처럼, 내 성향에 맞지 않는 책임에도 꾸역꾸역 읽기 바빴다. 그러니 가독성이 떨어지고 기억에 남지 않을 수 밖에.



그러다 책을 읽는 날들이 뜸해지며 나는 활자를 보기 싫어졌다. 나름의 슬럼프가 온 것이다. 몇 달 간 책을 가까이 하지 않자 TV, 휴대폰만 들여다보게 되었고 시간만 낭비하는 나날들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책을 사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정말 내가 읽고 싶은 책. 누군가의 제안이 아닌 오롯이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사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걸 실행에 옮겼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내가 읽고 싶은 책 3권을 골라서 구매했다. 그리고 그 중 두 권을 3일도 안 되어 후루룩 읽고 말았다. 그 중 한 권이 바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이다.



얼마 전 5월 18일이었다. 매해 그 날을 어떻게 보냈는 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에 나질 않는 걸 보면 늘 지내왔던 수 많은 날들 중 하나로 지나갔을 것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선 분명 역사 시간에 배웠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점차 잊혀지고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해 배울 당시 치기 어린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화도 나고 분노도 치밀었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것 보다 삭히는 것이 더 편해진 지금의 나는 어떤 일에 목소리 높혀 분노하기 보단 평범한 일상을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 사건에 대해 마음은 아프지만 화를 내기에는 그 시간과 내가 사는 시간은 너무 멀어보였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5월 18일 TV에서 김군이라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를 보았다. 한 장의 사진 속 매서운 눈빛으로 각인된 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는데, '김군'을 찾기 위해 당시에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여러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의 시선 속에서 과거의 이야기들이 재구성되고 여러 기억이 겹겹이 겹쳐진다. 그렇게 누군가는 거짓이라고 주장했던 '사건'이 명백한 '진실'로 그려지고 있었다.



아픈 기억을 토해내는 건 엄청 괴로운 일이다. 그 영화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은 다들 어딘가 모르게 지쳐있었고,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고 얘기하며 한번씩 힘든 표정을 지었다.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 진짜를 진짜로 증명해야 하는 게 말이 되냐며 말이다.



한 가지 공통점은 다들 이 시기의 날카로운 기억을 쉽게 떨치지 못하고 그 기억 속에 매번 살이 도려내는 아픔을 참으며 살고 있었다. 그 영화를 보며 매 해, 아니 매일, 매 순간이 아픔일 당신들에게 한 해에 한번이라도 5월 18일을 고이 기억하는 날이 없었던 내 스스로가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그래서 이 소설이 눈에 들어왔는 지도 모르겠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간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과,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이다. 소설로 끝이 아니다. 이 일을 자행한 누군가 대면해야 할 그리고 인정해야 할 뼈 아픈 진실이다.



1장 어린 새
2장 검은 숨
3장 일곱개의 뺨
4장 쇠와 피
5장 밤의 눈동자
6장 꽃 핀 쪽으로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이야기의 첫 장은 중학교 3학년인 '너'의 이야기이다. '나'도 아니고, 'OO'이도 아니고, '너'로 시작되어 흠칫 놀랐다. 하지만 제 3자가 지켜보는 시점에서 서술되었기에 '너'와 주변 상황이 더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너'라는 아이는 군인 총탄으로 너와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찾기 위해 찾아온 시신이 쌓여있는 도청에서 너는 뜻깊은 하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일하게 되었다.



너 보다 누나인 은숙과 선주가 죽은 몸들을 씻고 정돈하고 나면 너는 그들의 성별과 나이, 입은 옷, 신발의 종류를 장부에 기록하고 번호를 매겼다. 쪽지에다 같은 번호를 적어서 가슴팍에 핀으로 꽂고 얼굴 아래로 흰 무명 천을 덮어 누나들과 벽 쪽으로 시신을 밀어놓았다. 그러면 진수 형은 네가 장부에 기록한 인적사항을 보고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혔다. 너는 그걸 보고 찾아 온 유족들에게 흰 천을 열어 시신을 보여주고, 유족들과 만나고 죽은 사람들이 상무관으로 옮겨지는 걸 장부에 기록하는 것 까지가 너의 일이었다.



너가 이 일을 시작한 계기가 친구의 시신을 찾기 위함이라는 것과, 그 시신을 왜 애타게 찾고 있었는지의 이유가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누가 친구가 죽은 걸 봤다는 걸 듣고 시신을 찾으러 왔지만 사실은 친구가 죽은 걸 네가 봤다는 것, 너와 친구가 같이 있던 날 사건은 발생했고, 그 때 너만 살았다는 것.



그때 그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 하나로 시작한 일이고 그 죄책감 하나로 너는 그 도청을 떠나지 못하는 또 다른 혼이 되었다. 열 여섯이 이겨내기엔 벅찬 죄책감이란 무게가 나의 마음도 무겁게 짓눌렀다. 나 스스로 느꼈던 죄스럽고 부끄러운 맘을 씻으려고 읽은 책은 아니었지만, 열 여섯 소년의 죄책감에 되려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렇게 너로 시작된 이야기는 네 주변에 함께 일했던 누나, 형의 이야기로 파생되어서 결국은 너를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로 마무리가 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떠난 이들은 떠난 이들대로 아까운 목숨을 잃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지만,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가 나의 마음을 더욱 오래도록 아프게 했다. 장례식이 되어버린 삶을 사는 사람들. 그 마음을 어느 누가 알까? 이 아픈 기억은 죽어서도 잊을 수가 없겠지.








엄마와 아빠는 1980년도 4월 초에 결혼을 했다. 경상도 출신인 부모님은 그 해 광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치밀하게 언론을 통제했고, 관심이 가져지지 못한 만큼 그들은 외로운 싸움을 했다. 지금 코로나로 전 지역 사람들의 동선이 마구마구 드러나는 현재와 달리 좁디 좁은 한국 땅에서 그런 투쟁과 항쟁이 있는 동안 그 외 지역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반복적인 일상이 지겨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겹다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내 하루가 고요하고 평화롭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이 바로 과거의 여러 투쟁들의 결과고 많은 이들의 희생의 산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 일을 자행한 그 사람은 편하게 살지 못했으면 좋겠다. 매해 이 날을 더욱 아프게 기억하는 사람들과 달리 그가 잘 사는 건 너무나 억울하니까. 소설에서처럼 아직 떠나지 못한 숱한 혼들이 그를 늘 따라다니고 괴롭혔으면 좋겠다. '살인마' 라는 얘기에 눈 하나 꿈쩍할 양반일 듯 싶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매일이 괴롭고 아팠으면 좋겠다. 



5월 18일, 매년 이 일을 기억하는 것, 감사해하는 것, 분노하는 것 … 그 자체라도 그들의 삶에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작가의 이전글 나를 이야기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