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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태로운 끝

발 밑에 빼곡한 바늘들이 있지만, 버텨보는 거야.

by 여울LEE

의지와는 결코 상관없이,

위태롭게 바늘 위에
서 있는 순간이 오면.
/

[ ⓒ 여울LEE / 힘없는 시선 ]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 숨이 턱 막는 순간이

찾아오곤 해. 의지와는 결코 상관없이.


무기력해지기도, 불안감에

온몸과 마음이 꽁꽁 묶이기도 하지.


저 말 없는 바닥이 내 얼굴을

사정없이 당기지도 않는데, 어째선지

내 시선은 픽픽 맥없이 당겨져 가.


[ ⓒ 여울LEE / 바늘 끝, 그 위태로움 ]



근데 말이야.

사실 그 어떤 것보다 무섭고, 두려운 건.


무도 없는 공허한 어둠 속,

날카롭고 뾰족한 바늘 위에.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날 발견하는 순간이야.


자칫 잘못하다 발을 헛디딘다면

바늘 밑.


빼곡하게 촘촘히 박.

악랄하게 바짝 독이 오른 저 바늘들에게

슬픈 다이빙 하고 말 거야.


의지와는 결코 상관없이.


[ ⓒ 여울LEE / 바늘 아래, 더 많은 바늘 ]



멍한 시선으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숨을 내쉬다, 때론 실수하기도 해.


아뿔싸! 하고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을 바라보면.

금방이라도 우두둑, 하고 부러질 듯

날카롭지만 약한 바늘 끝에

매달려 있을 때도 있어.


의지와는 결코 상관없이.


이 바늘 끝이 제일 아프고, 무서운 줄 알았는데.

발 밑엔 더 아파질 바늘들이 있었어.


수두룩하게.


그래서 있는 힘껏

바늘을 붙잡고 있어 보는 거야.


[ ⓒ 여울LEE / 그래도 피어있구나, 넌. ]



그렇게 오랫동안 아슬아슬하게

바늘 끝 버티고 있을 때였어.


뾰족한 바늘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빛나는 너를 발견지.


아직 덜 자란 그저 어린 새싹인데도,

네가 보여주는 끈질긴 생명력 빛이

두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어.


그곳에서.

그래도 너는 피어있었구나.


나도 한 번 다시 피어나볼까, 하고

어디선가 용기가 생겨나.


바늘 끝에서. 바늘 위에서.

위태롭다가도


그런 너를 보며.



[ ⓒ 여울LEE / 그림에 빠져드는 밤 ]



/ 이번화에서는 누구나 겪는, 겪었을, 겪고 있는

좌절감 혹은 상실감에 휘몰아치는 무기력한 감정을

'바늘 끝에 서 있다'라는 느낌으로 표현해 본

내용이었습니다.


어느 날 무의식 중, 이유 없이 창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힘든 일로 지쳐있던 제 시선 속에

들어와 준 푸른 잎들의 힘찬 흔들거림이

강한 생명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너희는 그래도 그렇게 흔들거릴

힘이 있구나. 나만 정지해있었나 봐.'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상실감들을 툭툭 털어내고

다시 힘을 얻게 됐답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결코 원치 않아도

불편한 상황들이 생겨나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에 충분히 좌절하다가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느껴진다면

주저 없이 새로운 발걸음으로.


처음처럼 내디뎌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화에서 또 만나겠습니다.






[ 오늘의 삽화 ] 위태로운 끝

ⓒ 여울LEE



+ 그림 제작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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