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일기같은
한동안 브런치에 들어오지 않았다. 뭘 써야 할지 난감했고 원래 쓰고자 했던 '루와 뽀리이야기'는 꼭 해야만 하는 일처럼 부담으로 느껴졌다. 처음에 브런치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걸까. 막상 내 공간이 생기자 뒷걸음질치고 싶어졌다. 그저 잊고 싶지 않았던, 전혀 무겁지 않은 가벼운 일상의 기억이었는데 이를 글로 표현하려니 뭔가 그럴듯하게 포장해야 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루와 뽀리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그 다음엔 뭘 써야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뭐, 일단 쓰고자 했던 것부터 써야겠지만 변명하려니 모든 게 다 이유가 되는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게으름이다. 이 선천적인 게으름을 어찌해야 할까. 평생의 고민이다.
2025년은 크게 두 번의 도전이 있었다. 상반기에는 그림책 공모전을 준비했고 하반기에는 보림의 창작스튜디오를 준비했다. 한마디로 글보다는 그림에 무게감이 많은 도전을 했다는 거다. 첫 장의 그림에 가장 많은 시간이 들었다. 글을 썼을때 떠올랐던 장면과 느낌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 재료는 어떤 걸로 해야 할지 그리고 또 그렸다. 수채화 물감으로 그렸다가 과슈로 그렸다가 아크릴로 그렸다가 다 때려치우고 오일파스텔로 그렸다가 다시 과슈와 색연필을 같이 이용했다가...
두 도전 모두 이야기의 첫 페이지 그림에 한 달이라는 시간을 들였다. 한 달동안 하루에 5시간은 기본으로 계속 실패하고 계속 그렸다. 그리고 겨우 그나마 맘에 드는 게 나왔고 그 이후에는 조금은 덜 힘들여 그렸다. 하지만 역시나 그림의 벽은 너무 높았다. -뭐 그렇다고 나의 글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공모전도 창작스튜디오도 모두 떨어졌다. 그리고 깔끔하게 그림을 접기로 했다.
내가 그림에 더 욕심을 내었던 건, 류재수선생님의 조언이 가장 컸다. "지금은 어디에서건 너의 그림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그려라. 그러면 언젠가 모든 곳에서 너의 그림을 원할 것이다. 내가 확신한다." 어이없이 단순하고 그냥 막 그린 그림인데 류영선 선생님과 류재수 선생님의 평가가 모두 좋았다. 처음엔 당혹스러웠는데 나는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보다 싶어 욕심을 냈었다. 게다가 한울림 출판사와의 미팅에서 그림쪽 담당자도 나에게 계속 그릴 것을 당부했었다. 그 모든 게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었는데 언젠가 그림으로 나를 찾아줄 출판사를 만나는 건 10년 이후의 일로 미뤘다. 계속 그림은 그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글에 집중하기로 했다.
써두었던 글 중에서 몇 개를 골라 다듬었다. 그리고 일단 세 곳에 투고했다. 계약을 조건으로 소식이 온다면 너무 기쁘겠지만 덤덤하게 다음 투고할 출판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새롭게 떠오른 이야기 두 편의 줄거리를 작성했다. 이제 장면을 나누고 글을 쓰고 계속 다듬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또 투고해야지.
그림책을 준비하는데 그림은 없이 글만 써서 투고한다는 건 경험해 보니 굉장히 힘든 일이다. 어떤 출판사에서는 아예 미리 예고를 하기도 했다. "글원고만도 받기는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라. 채택률이 굉장히 낮다." 처음엔 서운했는데 지금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2023년과 2024년에 각각 글을 계약했다. 당시는 계약을 하고 나면 바로 그림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바로 책이 출간되는 줄 알았는데 이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라. 그림작가를 섭외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섭외가 되어 작업에 들어가도 글작가와 그림작가 간의 해석의 문제가 생기면 중간에서 출판사가 조율을 해야 한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글과 그림이 각각 다른 사람이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가 되고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였어도 이런 수고로움이 많은 작업보다 글과 그림이 하나가 되어 더욱 완벽하고 좋은 원고를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이왕 글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거, 영역을 조금 넓히기로 했다. 그래서 다음 공부를 계획하고 있다. 내가 어디까지 가게 될지, 그저 루와 뽀리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작은 마음 하나로 시작한 일이 얼토당토않게 이어지는데 이제는 나의 걸음을 즐겨보기로 했다. 귀차니즘이 장착된 나의 자세를 유지하며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