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에 대한 단상
비 오는 날 가만히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하루 종일 분주했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따뜻한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 순간 그 온기에 집이 더욱 아늑하게 느껴진다. 긴장을 이완시키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빗소리는 음악처럼 공간을 채운다.
하지만 이렇게 운치 있는 비가 달갑지 않은 순간이 있다. 바로 운전을 할 때이다. 나는 5년째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이제는 떼고 다니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운전대를 잡으면 긴장으로 어깨는 솟고 몸은 핸들에 밀착된다. 그런 거 보면 나는 여전히 초보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도로는 차들로 엉키곤 한다. 아마 도로의 하얀 차선들이 빗물에 희미하게 보일 때가 많아서 일 것이다. 횡단보도 너머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남의 차선으로 갑자기 끼어드는 차들도 많이 보인다. 뒤에서 보고 있으면 아찔하다. 나는 옆 차선으로 넘어갈 때 사이드미러로, 어깨너머로 두 번, 세 번 주변을 살핀다. 운전 연수를 받을 때 꼭 필요한 말만 하던 담당 선생님은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나지막이 물었다.
"혹시 여기에 토끼와 노루가 살고 있나요?"
그만큼 내가 주변을 요리조리 살핀다는 뜻이다. 도로가 아니라 산속을 운전하듯 말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운전하는 동안, 특히 아이가 타고 있는 순간, 나의 긴장도는 최고조에 이른다. 그래도 잊지 않고 꼭 하는 것이 있다. 흔히 깜박이라고 부르는 비상등 켜기이다. 주로 비상시에 눌러야 하지만, 옆으로 차선 변경을 할 때 누군가 일부러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경우에는 고맙다는 의미로 깜빡이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인사를 받아본 적이 있다. 능숙하게 운전하는 분들은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한다. 그럴 때면 작은 인사에도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양보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그냥 쌩하고 지나쳐버리는 차들도 많이 있다. 나 역시 지금보다 더 초보였을 때, 운전을 막 시작했을 때는 핸들에서 손이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비상등까지 가는 거리가 십 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차 안에서 '고.. 고맙습니다'하고 혼잣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렇게 지나치는 차들을 보면 '혹시 나처럼 초보인가?' 생각한다.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복잡한 도로에서 타인이 베푼 호의에 대한 기본 매너를 지키는 운전자를 만날 때 더 기분 좋은 것은 사실이다.
상대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고맙다는 말. 이 말은 어디에서 온 걸까. '국어 어원사전'에 따르면 고마의 어근은 '곰'이다. '곰'은 신(神)을 뜻하는 '감'과 같은 어원을 따르기에 결국 공경, 존귀의 대상인 신에게 감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에는 상대를 존귀하게 여기고 공경한다는 의미가 함께 들어있는 것이다.
일본어의 어원 또한 재미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현대 일본어의 '감사하다'라는 형용사는 아리가타이, 즉 어원적으로 '(상대방의 호의 등이) 있기 어렵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흔치 않다는 뜻에서 고맙다는 뜻으로 발전한 단어다. 해서 일본어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결국 기본적으로 상대의 호의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뜻이다. 때로 우리는 상대의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자신이 기대한 만큼의 호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상대에게 섭섭해하며 불만을 토로하거나 원망의 말을 쏟아내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면 마음 한 편이 씁쓸해진다.
학교에서 일할 때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분은 사회적으로 유명한 감독이었고 나 또한 그분이 연출한 작품들의 열혈 시청자였다. 나의 전임자가 그분의 논문을 받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호의를 당연한 듯 받아들인 것이 문제가 되었다. 어느 일요일,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왔다. 그 감독님이었다. 다짜고짜 본인의 용건만을 전달하는 전화를 받고 나의 개인번호는 어떻게 안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통화 매너에 굉장히 불쾌했던 기억이 난다. 전임자와 달리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나에게 오히려 원망의 말을 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며 호의를 고마워하지 않고 당연히 여기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독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상대를 존귀하게 여기고 공경한다는 뜻을 가진 고맙다는 말에서 우리는 이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 짧은 말 한마디는 많은 것을 내포한다. 고맙다는 말은 당신이 나에게 보여 준 호의를 내가 알고 있다는 표현이고 그 호의는 흔치 않은 일이며 그런 일을 기꺼이 해준 당신께 나의 마음을 말로 보답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상대를 존중하며 우리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으로 얻은 것 중에 하나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알아보는 눈이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오늘도 소망한다. 누군가 나에게 보여 준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건 인생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