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게트 Mar 19. 2018

살림을 돌보다

내 기준에서 야무진 사람은 오롯이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데, 이 기준에 따르면 난 전혀 야무진 사람이 아니다. 살림에 서툰 딸은 좀처럼 야무질 수 없다. 아무리 똑똑한체 해도 부엌에 있는 노끈을 못 찾아서 결국엔 엄마를 부르고 만다.

젊은 딸(24.9살을 어린 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되나..?)의 허술함은 모조리 집안살림에서 드러난다.  깨진 화분에 묶는 매듭이 자꾸 풀리고, 책상은 치워도 어수선하다. 고양이에게 줄 참치캔을 못찾아 뒷베란다까지 뒤졌다가 찬장 한구석에서 겨우 발견하고 만다.

딸은 이렇게나 아둔하다. 그리고 아둔함의 뿌리엔 무책임이 있다. 뭐든 귀여워 할줄만 알지 돌보는 법은 모르는 딸은 주워온 길고양이에게 이름만 지어주곤 이내 모든 일에서 손을 떼버렸다.  한겨울 집안에 들인 화분들이 만들어낸 녹음이 아름답지만 물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뿐이랴, 저녁반찬으로 먹은 낙지젓갈이 맛있어도 내손으로 꺼내먹는 법은 없다. 엄만 다 해둔 반찬을 꺼내 먹으라는 것까지 딸에게 사정해야 했다. 엄만 이런 내가 고양이 같다고 한다. 하루 종일 나가 놀다 들어와선 제 몸뚱이를 핥고 쓰러져 자는 고양이들은 분명 나와 닮았다. 딸은 제 몸뚱이를 치장하는 법은 있어도 돌보는 법은 없다.

우리집에서 돌봄은 언제나 엄마의 몫이어서, 나도 여전히 엄마의 돌봄에 익숙하다. 하지만 돌봄은 당연히 당신의 몫이라는 태도로 배를 깔고 드러누운 고양이는 귀여워도, 같은 짓을 하는 딸은 야속하다. 엄만 분명 내가 야속할 것이다. 8년전, 여느 때처럼 지각한 고등학생 딸을 차로 실어나르던 엄마는 내가 비타민을 챙겨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핸들을 내리치며 고함을 쳤다.

"왜 내가 안 챙기면 아무도 아무것도 못하는데, 왜 내가 다 챙겨야 하는데!"

그때 엄마는 매일아침 지각하는 딸을 차로 실어나르고 돌아와선 아픈 남편을 재활원에 보냈다가 두어시간 뒤 시어머니를 노인대학에 내려놓고 오는 길에 다시 남편을 집에 데려왔다. 엄마는 식구들이 먹을 밥까지 챙기고서야 출근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난 엄마의 부담을 단 1그램도 나눠가진 적이 없다.

딸이 대학까지 졸업한 지금 엄마는 체념한 듯 "이 집은 내가 죽으면 돌아 가지를 않아"라고 할 뿐이다. 엄마의 "이 집"엔 마당의 나무와 길고양이, 또 집안의 화초와 고양이, 그리고 우리 식구가 포함돼 있다. "내가 그래도 고양이 똥도 치우고 집청소도 하는데."라는 변명은 넣어둘 수밖에. 아무리 어리버리해도 도움과 돌봄이 다른 건 안다.

난 자꾸 엄마를 도우려 한다. 청소라도 내가 해야지. 내가 먹은 밥그릇은 내가 치워야지. 오늘은 내가 길고양이 밥을 챙겨야지. 그럼 엄마를 조금이나마 돕겠지. 엄마의 일손을 더는 것만으론 엄마의 부담을 덜 수 없다. 다 알면서도 게으른 딸은 자꾸 돕겠다는 생각 뿐이다.

집안을 돌보는 엄마는 모든 것에 능숙하다. 반찬통과 식기구는 엄마의 동선에 맞게 배열돼 있고, 고양이 사료는 떨어질 틈이 없다.

"엄마 이 화분 어디에 놔?"

엄마는 어쩔줄 모르고 서있는 딸의 손에서 화분을 가져갔다. 겨울을 맞아 마당의 화분을 들여놓을 때도 엄마는 거침없었다. 내가 화분 두어개를 겨우 옮겼을 때 엄마는 마당 정리까지 모두 끝낸 참이었다.  모든 것에 제 자리를 찾아준 뒤 기진맥진한 엄마는 "딸 덕에 빨리 끝났다"는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추위를 피해 집에 들어온 화분, 깔끔해진 마당에 부는 늦가을 바람 모두 평온하다. 살림을 돌볼줄 모르는 딸 혼자 어쩔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상이 없는 일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