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게트 Mar 19. 2018

단상이 없는 일상

늦잠을 잤다. 오전을 통째로 날리고도 한참을 멍하니 있다 겨우 밖으로 나왔다. 비 냄새가 났다. 난데없이 생각난 건 중학교 다니던 무렵 살던 집의 내 방이었다. 침대 맡에 난 창문을 항상 열어둔 탓에 비가 오면 비 냄새가 내 방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열어둔 건 창문을 기어오른 담쟁이넝쿨을 보고 싶어서였다. 빗방울을 맞을 때마다 떨어대던 아기 손 같은 이파리가 귀엽기도 했고, 한참 구경하다보면 나무 창틀에 빗물이 튀는 게 좋았다. 습기를 머금은 벽지가 우글쭈글해지다 못해 곰팡이를 피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안에 있지만 밖에 있고, 책을 보면서 비를 맞을 수 있었다. 비 오는 날도 꽤나 산뜻했다.

그 무렵 담쟁이넝쿨이나 나무 창틀 같은 건 도처에 널려있었다. 팬질을 하던 보아의 포토카드를 책상 유리 틈에 잔뜩 끼워뒀고, 문엔 좋아하던 연예인 포스터나 집회를 나갔다가 받아온 유인물을 붙여두기도 했다. 대체로 처음이라 더 유별나게, 티가 나게, 덕지덕지 자랑하듯 붙여뒀던 것들이다. 처음으로 팬이 된 가수, 처음으로 반한 연예인, 생애 첫 집회.


단상이 많은 밤이었다. 비 오는 날 담쟁이넝쿨 들여다보듯 자기 전엔 그런 첫 경험들에 약간의 상상을 더해 곱씹었다. 막 읽기 시작한 소설의 한 장면을 상상하거나 무의미한 공상을 하다 나도 모르게 잠 들기도 했다. 일상은 보람이 없어도 자극은 많았고, 깔끔하진 않아도 단상이 많았다. 우중충한 날씨와 기분을 달랠 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때보다 정돈된 일상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장소에 가서 정해진 시간만큼 공부하고, 정해진 일과를 마무리해야 한다. 규격화된 하루는 보람찰지언정 자극은 없고, 정돈됐을지언정 단상은 없다.


자기 전 곱씹을 것도 일과뿐이다. 미처 끝내지 못한 과제를 언제까지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다 잠든 날엔 꿈에서 과제를 해야 했고, 과제를 다 하고 지쳐 쓰러진 밤엔 가위에 눌리기가 부지기수다. 잠드는 게 무섭다. 맥주 한 캔을 마시고 기절하듯 잠드는 밤이 많아졌다. 부은 얼굴과 더부룩한 속으로 맞는 아침이 불쾌하다. 자극과 단상이 없는 일상에선 이렇게 밀려오는 우중충한 기분을 달랠 거리도 없다.

얼마간은 분명 정돈된 일상을 보내며 보람을 느꼈는데 이제 그마저도 잘 안 된다. 도저히 맥락이 잡히지 않아 퇴고를 미뤄둔 글이 남아있고, 어제 쓴 글은 쓰레기 같았다. 주말엔 시험이 있고, 오늘은 늦잠을 잤다.

매거진의 이전글 긴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