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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Apr 15. 2020

우리는 좋아하지 않지만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나는 그냥 엄마가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어.”
“너를 항상 사랑한다는 거 알잖니”
“그런데 나를 좋아하냐고.”     

 _영화 <레이디 버드> 中      


질풍노도의 정점에 서 있는 18살 딸내미 레이디버드와 그녀의 엄마가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나는 레이디버드가 아직 어리고 어리석어 엄마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더 깊고 진한 감정을 표현했음에도 ‘그건 그렇고, 그래서 나를 좋아하냐’고 되묻는 식으로.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속 레이디버드는 섣부르고 무례한 언행으로 종종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여느 사춘기 시절의 아이처럼 꼬일 대로 꼬여있었다. 아주 배배.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란 자고로 좋아하는 마음이 발전하여 형성된 못내 소중하고 애틋한 감정이 아니던가.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 상대를 위해 기꺼이 내 시간과 에너지, 자본을 희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는 거지.      


그러니 레이디버드의 눈에 너울이 씌어 진 거 아니면 뭐겠어?

라고.

당시엔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당시’로부터 얼마간 멀어졌을 때. 시간으로는 한 2년 쯤, 물리적으론 부산에서 강원도까지. 그만큼 떨어지게 되었을 때 나는 깨닫고야 만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은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걸. 요컨대, 사랑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선 충분히. 추웅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2달 전, 나는 직장문제로 부산에서 강원도로 오게 되었다.

김해에서 나고 자랐으며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고 모든 직장경력을 그 범위 그 테두리 안에서 쌓았던 나는

그야말로

한순간에

갑자기,

뚝.

강원도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당연히 아무런 연고도 연관성도 요만큼의 경험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사실은 힘들다는 말로는 다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힘들었다. 낮에는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 업무에 적응하느라 온 몸이 마분지처럼 빳빳하게 굳었고, 밤에는 1인분의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 위속까지 쪼그라들었다.     


거기에 ‘나와 취향과 생각과 감정과 의견을 공유할 이가 이곳엔 정녕 아무도 없다’는 구슬픈 사실이 더해져 나는 매일 밤 지독한 고립감과 불안과 초조와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과 지긋함,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원망과 환멸 속에 끙끙 앓다가 눈을 감곤 했다.     


그래서 나는 언니와 친구들에게 한동안 열심히 전화를 걸었다. 요즘 무엇을 하고 어떤 걸 보고 무슨 생각과 감정을 붙들고 있는지, 서로의 시시콜콜한 일상과 내면을 나누었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친근하고 정에 겨운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풀어졌고, 다시 새로운 색들이 채워졌다.      


허나. 나는 엄마에게만큼은 전화를 걸지 않았다. 이틀에 한번 꼴로 오는 그녀의 전화를 받는 일도 없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후 핸드폰을 뒤집어두었다. 글쎄, 왜 그녀와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지.



엄마의 전화를 피한지 한 달 반이 다 되어갔을 땐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왜 전화를 받고 싶지 않은 걸까. 왜 대화를 덮어두려는 거지.


엄마가 너무나도 해맑고 단순한 사람이어서? 그래서 내가 느끼는 애환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이해조차 할 수가 없어서? 언제나 “우째ㅜ 파이팅~”, “힘내^^”와 같은 아무런 효력도 진심도 없는 휘발성 강한 단어를 팅- 던지다가, 이내 “근데 내가 어디서 너~무 예쁜 옷을 봤는데 너도 하나 사줄까?” 식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녀에게 하고픈 말도 기대할 수 있는 말도 없다는 생각에서일까.

     

아니다. 이건 제 1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위로와 공감에 소질 없는 건 우리 언니도 마찬가지니까. 그럼에도 나는 언니에게 별일 없이 전화를 걸어 뭘 하고 있었는지, 뭘 먹었는지 같은 목적지 없는 대화를 곧잘 이어가니까.     

 

그렇게 머릿속의 의문과 상념을 엮어가며 뭉쳐있던 타래를 하나 둘 풀어내다 보니. 어느새 마음 한가운데엔 전에 보지 못했던 명제 하나가 선명히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좋아하지 않아



아, 그렇구나. 그랬구나.

그래서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고 조잘조잘 수다를 떠는 순간들은 그리도 간절했으면서,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쉽게 그려지지가 않은 거였구나. 부산의 작은 거리마다 골목마다 눈에 밟혔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은 들지 않았던 거구나.



나는 엄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분명하다.

나는 그녀와 나누는 대화가 즐겁지 않고,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유쾌하지 않다. 그녀와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지도, 마음이 들뜨지도 않는다. 그녀와 함께하는 순간이····슬프게도 기대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우린 서로를 좋아하기엔 ‘어쩜 이다지도 다른 모녀’였다.

서로 같은 것을 봐도 전혀 다른 것을 느꼈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애초에 사고회로 자체가 정반대로 뻗어 있는 것처럼. 엄마에게 있어 나는 너무나도 비관적이고 회의적이며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복잡하게 무언가를 오래 생각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 딸애는 어딘가 잘못됐으며 비정상적인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엄마는 학창시절의 내가 왜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일절 관심이 없었고, 그저 나의 언행을 질책하기 바빴다. 너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며, 너는 비정상이라고.  

   

나 또한 엄마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무신경해보일 정도로 해맑고 단순하며 종종 아찔할 만큼 긍정적인 그녀를 보고 있자면 가슴이 답답했다. 힘에 겨웠다. 그녀가 내 슬픔과 우울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면 속눈썹마저 무겁게 내려앉았다.



돌이켜보면 너무도 간단하고 명확한 이 사실관계를 이제껏 자각하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이것 또한 저명한 사실이다.     


나는 그녀를 위해 내 시간과 에너지, 자본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 상황을 제쳐두고 달려갈 것이다. 나는 엄마를 좋아하지 않지만 사랑한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일터. 그렇기에 함께하는 시간이 기대되지 않음에도 이렇게 멀리, 오랜 시간 떨어져 있노라면 우리는 서로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나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순간이 생각나는 게 아니라, 그녀의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젖히고 깔깔 웃는 그녀 눈가의 주름이 떠올랐다. 웃을 때 둥그렇게 벌어지는 입 꼬리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리하여, 나는 좋은 영화를 보고 맛있는 걸 먹을 때. 아름답고 멋진 순간을 마주할 때면 어찌할 도리 없이 그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막상 그 순간을 공유하게 되면 그녀와 나 사이엔 또 다시 밋밋하고 납작한 시간이 흐르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그녀와 나는 정반대의 성향과 취향을 가진 개인이기 이전에, 엄마와 딸이기 때문이다. 서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등을 돌려버리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었다. 너무 많은 표정과 찰나를 봐버렸다.



다시.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지만 사랑한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일 터. 아마 우린 평생토록 그러할 것이다.     


이것을 알고 받아들인 이후로, 나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많은 것을 덜어낼 수 있었다.

애써 그녀와 시간을 보내려고 하지도, 그렇다고 피하거나 덮어두려 하지도 않았다.

힘을 들여 그녀를 이해하려고도, 이해시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좋아하려고 노력하지도, 좋아해주기를 바라지도 않게 되었다.     

이전보다 훨씬 건조하지만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애증’이라는 무겁고 찐득한 단어에서 벗어나, 한층 객관적이고 가벼운 언어로 우리 모녀사이를 재정의 한 것이다.     

 

그러니, 당신들에게도 묻고 싶다. 이 글을 보면서 누구를 떠올렸는지. 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는지. 혹여나 이 사회의 관념이나 이념으로 인해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사랑하지만 좋아하지 않거나, 좋아하지만 사랑하지 않거나. 혹은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거나. 어쩌면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미워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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