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예란 Mar 21. 2020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 인생도 가치가 있을까?

그럼, 그렇고 말고. 왜냐하면...


그런데 왜 너는 그 모양이야,
네 친구는 그렇게 좋은 데서 일하는데 왜 너는 그 모양이냐고!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서 단짝으로 지내는 친구가 지금 대형 방송국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노라, 엄마에게 말하자 답답함과 분노 섞인 답이 돌아왔다. 당시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각자 ‘경력 쌓기’에 돌입했던 나와 친구가 너무나도 다른 상황을 맞게 된 것에 대한 울분이었다.  


온라인쇼핑몰 신생기업에서 쥐 발톱만 한 월급(쥐꼬리도 안 됐다)을 받으며 열악한 근무환경과 악덕상사를 견뎌야 했던 나와,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만한 기업에서 꽤 만족스러운 인턴생활을 하고 있던 친구. 그 상황에 대해, 그 간극에 대한 울분.     


사람을 갈아서 회사를 운영하겠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진 상사에 질려 주말동안 본가에서 피신하고 있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조용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투둑투둑 눈에서는 서러운 물방울이 뭉텅이 채 밀려나왔다. 붙잡는 엄마를 뒤로하고 기어코 현관문을 닫았을  이미 내 안의 무언가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날 정장 15시간을 내리 울었다. 차가운 자취방에 엎어져 온 얼굴이 다 짓무를 때까지, 성대가 걸레짝이 되어 아릿하게 저려올 때까지 울고 울고 또 울었다.   

  

당시 나를 그렇게까지 끌어내렸던 건 거지같은 곳에서 거지같은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해야 하는 상황도, 가장 친한 친구와 그런 방식으로 비교 당했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회의감 때문이었다.

고작 그런 소리나 들으려고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왔나, 하는 자기 파괴적인 생각과 부모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인생이라는 지독한 회의가 나를  못내 견딜 수가 없게 만들었다.       


결국 새벽까지 진정 하지 못한 나는 두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왜 이런 소리 들으면서까지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엄마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인정받지 못하는 인생인데 살아서 무얼 하겠냐고. 속에 맺혀있던 시뻘건 울혈들을 마구 토해냈다.

  



“엄마가 네 인생을 인정하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냐.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는 지가 아니라, 네가 네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중요한 거야.
엄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 스스로가 네 인생을 인정해주는 게 중요한 거라고.”      


한동안 가만 듣고만 있던 언니가 마침내 낮고 조용하게 입을 뗐다.


그를 기점으로, 거짓말처럼 내면에서 폭주하고 있던 것들이 크게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내내 울컥거리며 목울대를 짓뭉갰던 덩어리들은 이내 훌쩍이는 웅얼거림으로 바뀌었고, 나는 그렇게 열 몇 시간 만에 비로소 사람답게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인정해주는 게 중요한 거라고. 나는 그때 저 발화가 정확히 뭘 의미하지, 어떻게 하면 그리 할 수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다만 저 말이 세상에 ‘정답’이라 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실 중 하나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가만가만 입을 떼는 언니가, 어찌할 도리 없이 옳을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그 한없던 새벽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렇게 채 여물지 못한 상태 그대로 마음속에 들어앉아버린 저 말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슈가맨에 혜성처럼 등장한 양준일이 '20대의 자신에게 영상편지를 보내려'입을 뗐던 바로 그 시점부터.      


준일아. 네 뜻대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내가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 질 수밖에 없어  

 

아마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준 건 후반의 문장이겠지만, 내게 닿아 빛을 틔운 건 그의 첫 마디였다.      


그는 불운에 눌려 번번이 좌절됐던 순간들, 처절하게 외면당해 그저 묵혀내야만 했던 시간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공감과 위로, 인정이 덧대지지 않은 과거의 땀방울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았다. 미화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작고 볼품없던 시기에 대해 이렇게 시인했다. 


내가, 알고 있다고. 기억하고 있다고.

아무도 관심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겠지만, 그 비틀대며 넘어질 듯 걸어온 발자국들을 내가 다 안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자신이 기특해 보이는 순간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았던 반짝이는 경험들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워 바닥에 납작 엎드려 지내야 했던 누추한 시간들마저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지워내고 싶은 ‘치부’로 남겨두는 게 아니라 그것 또한 내가 걸어온 길의 한 부분으로서 인정해주는 것이다.  


양준일은 그 지난한 시기를 스스로 인지하고 바라봐주었기에, 지난날의 나처럼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실패의 경험이 늘었을지언정 인생에 ‘오점’이 생기지는 않았다. 다시, 삶을 겸허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2년이라는 시간 끝에 언니의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내가 지나온 애환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며 생각했다.     


나 정말 이때 많이 힘들었지. 열심을 다했지만 결과가 안 좋았어. 땅에 엎어져서 지옥 같은 순간들을 견뎠었는데. 정말 아무의미 없이 아프기만 해서 하루하루가 참 버거웠어···· ····.
그래도, 괜찮아. 내가 알아. 네가 이런 시간들을 견디어 온 걸, 내가 다 기억하고 있어.
 누구도 관심 없을 테고 누군가는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다 알아줄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눈을 꼭 감았다. 물론 2년 전과는 다른 의미로. 신기하게도 전혀 비참하거나 슬프지 않았고, 뭐랄까. 미지근한 물에 쇄골까지 몸을 담그고 있는 듯했다.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차오르는 것 같기도.

분명 안에서 무언가 여물고 있었던 것일 테다. 혹은 아물고 있거나.  




그리하여, 현재. 나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인정해 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이제는 안다. 그래서 누군가 내 실패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질책해도 전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슬플 수 있겠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을 테다.


무너지지 않는다. 그 조각 또한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인생이라는 나선의 한 부분임을 앎으로. 언젠가 출구에 다다랐을 때, 그 역시 내가 발걸음을 내디뎠을 하나의 조각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안다.  

작가의 이전글 문득, 떠오른다면 퍼뜩! 전해보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