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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Dec 19. 2020

집을 돌보는 시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지난 10월. 생에 처음으로 자취방을 얻었다 드디어! 아, 하숙집과 쉐어하우스를 전전했던 지난날들이여 안녕 아디오스. 그렇게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설렘을 안고 입주 전날 곧바로 이케아(IKEA)로 했고. 식탁이며 의자, 공간을 채울 물품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쓸어보고 앉아보고 비교해가며 신중을 가해 골라냈다. 집으로 고이 모셔온 가구들을 손수 목공질(?)까지 해서 제자리에 척, 배치하니 이야, 하고 뿌듯함이 현관에서부터 밀려오더라.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사물에 애정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 이상하지, 나는 원체 물욕도 없고 지독한(?) 실용주의자라 가성비를 따져 필요한 물건만 딱딱 사는 사람인데. 그래서 엄마와 언니가 종종 새로 산 컵이나 이불을 자랑하며 그것을 사랑스럽다는 듯 매만질 적에 ‘ㅎ··· 그렇게 좋을까.’ 의아해하곤 했는데.      


그런 내가 거실에 놓인 하얗고 반듯한 식탁하며 방 벽면에 배치한 감색의 목재 책상, 그 위의 자주색 스탠드 조명까지, 그 모든 사물들을 사랑스럽다고 여기다니! 역시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직접 품을 들여야만 애정이 생기는가보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보러가고, 만져보며 감촉을 느끼고, 이것저것 취향을 따져 비교해본 후 비로소 손안에 안착한 것들에 마음이 부푸나보다.     


하지만 그런 풍실풍실한 마음도 잠시. 어여쁜 사물들과는 별개로 나는 새 집에 썩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묘하게 겉도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직은 어색하다고나 할까···. ‘집순이’ 체질과는 거리가 먼지라 아침에 눈뜨면 집을 나서 해가 저물면(오후 6~7시쯤) 돌아오곤 하는데. 글쎄··· 현관문을 열면 보이는 어두컴컴한 거실하며 싸늘하게 냉기가 도는 바닥, 하숙집과 쉐어하우스에서 살던 때와는 달리 아무런 인기척도 온기도 없이 그저 적막만이 감도는 공기.     


그 안에서 냉장고에 있던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홀로 식탁에서 먹을 때면 쓸쓸함과 외로움, 동시에 무기력이 밀려와 나를 몹시 적적하게 만들었다. 결국 난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한 채 저녁까지 밖에서 먹고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지경에 이르렀고. 안락하고 포근할 줄 알았던 나의 첫 집은 그렇게 잠만 자는 장소로 전락해버렸다. 어서 빨리 잠들어 이 어둠이 지나가고 내일 아침이 왔으면.      



그러던 중,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늦잠을 잔데다 만사가 귀찮아져 밖에 나가는 대신 집에서 할 일을 하기로 했다. 거실 창을 가리고 있던 블라인드를 끝까지 걷어 올리고 늦은 아침을 정갈히 식탁에 차렸다. 간만이네 이런 느긋함. 사과를 한 입 베어 입안에서 우물거리고 있는데 창을 통해 맑은 겨울 볕이 들어왔다. 차락, 식탁 너머까지 펼쳐지는 맑고 해사한 햇살에, ‘아 오후의 이 집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구나.’ 조금 놀랐다. 싸늘하고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던 사람의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마룻바닥을 적신 나른한 볕을 바라보며 찬찬한 마음으로 식사를 마치고, 좋아, 이런 날엔 청소를 해야지. 창을 활짝 연 후 청소기로 거실과 바닥을 쓸고 밀대로 이곳저곳을 닦았다. 화장실에 락스를 뿌리고 타일 틈새 사이가 하얘질 때까지 솔로 박박. 아 말끔하도다. 시트러스 향이 나는 주방용 세제로 싱크대의 때를 제거하고 창틈에 낀 먼지까지 물티슈로 사악 훔쳐냈다. 때를 빼고 광을 낸 집에서 노트북을 켜 본격적으로 할 일을 했고, 해가 저물자 난방을 켜 바닥과 공기를 데웠다. 요리를 해 조촐하게 저녁을 차려 먹고 남은 시간에는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하루를 마치기 직전 일기를 쓸 때 쯤. 나는 깨달았다. 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집, 너도 그렇다. 온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내보니 알겠더라. 아무리 멋진 물건으로 채워진 근사한 곳이라도(우리 집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 안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야만 마음이 폭, 안착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는 것을. 나는 그날 집을 치우고 할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유튜브를 보기도하고 간식도 꺼내먹었으며 약간의 운동과 소소한 요리를 했다. 그 시간동안 전혀 쓸쓸하거나 적적하지 않았고, 오히려 편안하고 느긋했으며 여유로웠다. 몇 평되지 않는 공간에서 나는 그날 안락함을 느꼈다.      


직접 품을 들인 물건에 애정을 갖게 되는 것처럼, 집도 넉넉히 품을 들여 살펴보고 돌보고, 충분한 시간을 함께해야 정이 붙는다. 이전에 살던 공동주거공간에 있던 물건들에 애정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을 고르고 가공하고 배치하는 그 어떤 과정에도 내 손길이 배어있지 않아서였다. 그것들은 ‘원래’ 그 자리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묻힌 채 존재했으며, 미적취향이나 디자인과는 상관없이 그저 기능에만 충실한, 말하자면 가구보다는 도구에 가까운 물품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집도 잠깐 몸을 누이고 금세 어디론가 떠나는 용도로만 사용된다면, 그 공간은 결코 ‘Home’이 될 수 없다. 그저 ‘주거’의 기능에만 충실한 ‘House’일 뿐이지.     


그리고 또 한 가지 깨달은 건, 바로 현재의 일상이 싫어질수록 집을 가꾸고 돌보는데 더욱 시간을 쏟아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집이야말로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므로. 마음처럼 되는 것 하나 없는 꾸깃꾸깃한 일상에, 집까지 얼룩덜룩 꼬질꼬질하다면 마음은 자꾸 ‘비일상의 공간’으로 떠나고 싶어할 테니까. 예쁘게 차려진 카페나 그림 속 여행지 같은, 나의 일상과는 가장 먼 곳으로 말이지. 그러니 일이 좀처럼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는 일단 집부터 착착 보살펴보는 게 어떨까. 분명 마음이 한결 쾌적해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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