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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Dec 27. 2020

정신과 의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으로 정신의학과를 다니고 있다 2주전부터. 성실한 시간 덕에 이제 3주가 알뜰히 채워져 가는구나. 이유야 어쨌든 이제와선 중요치 않으니 밝히진 않을 거고. 처음 방문한 심리상담 센터에서 ‘우울증 고위험군’으로 진단받아 병원 약물치료와 상담을 동반할 것을 권유받았다.      


병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의사선생님은 나의 상태를 살피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나는 떠듬떠듬 답을 쥐어주었다. 10분가량의 대화가 끝나갈 즈음 선생님은 처음이니까 약을 아주 약하게 처방해주겠다고. 너무 약해서 효과를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으나, 일단 일주일 먹어보고 경과를 살펴보자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과연,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약의 효과는 미미했다. 다만 이전엔 하루 온종일 우울하고 무기력했다면 약을 먹은 후부터는 하루 중 기분이 가만가만한 순간이 한번쯤은 있었다.     


두 번째 방문 시엔 약물 수치를 조금 더 높였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에 봅시다 예란씨.” 수치를 높이니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가장 좋았던 건 수면장애가 많이 개선된 것. 한 달 반전부터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침대에 누우면 불안과 우울, 환멸과 분노, 그리고 슬픔과 슬픔이 겹쳐져 잠을 자꾸 밀어내잖아. 그런데 자기 전 약을 먹으니 정신은 몽롱, 육체는 말랑해져서 눈을 감은 후 30분 이내로 잠들 수 있었다. 깨어있을 동안에도 부정적인 생각과 우울감이 훨씬 줄어들었다.    

 

그런데 아차. 내가 너무 낙관했었나. 우울의 동반자 무기력은 헹,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하고 비웃듯 좀처럼 잡히지가 않았다. 실은 내겐 ‘현실도피식 잠자기’병이 있는데(내가 이름 붙인 병이다), 말 그대로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 내일을 마주하기 싫을 때 잠을 잔다. 아주 길게 마치 죽은 듯이.  

    

이번에는 꼬박 이틀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만 잤다. 전화도 안 받고 카톡에 답도 하지 않았다. 아, 아무것도 하기 싫어라. 책도 영화도 유튜브도 사람도 다 싫다, 싫어. 그렇게 어영부영 부유하는 미세먼지처럼 시간을 흩날려 보내고서 다시 병원 앞에 섰다. 

하루 이틀 사흘···· 대체 일주일이 왜 이렇게 빨리 흐르는 거야.     

      

선생님 앞에 앉은 나는 그동안의 나의 상태를 미주알고주알 일렀다. 우울감과 부정적인 생각은 확실히 줄었고 밤에도 훨씬 편히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피식으로 계속 잠만 잤다. 나는 너무 무기력하다. 그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다가 또 그런 내 모습이 못 견디게 싫고 한심하고 불안하다 그러니까 나는········. 


내내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말을 이어가던 아니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예란씨,
나는 예란씨가 좀 그랬으면 좋겠어.      


침울한 속눈썹에 눌려 있던 눈동자가 순간 번쩍 들어 올려졌다.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았다. 선생님도 내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예란씨는 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요. 왜, 팔 다리가 부러진 사람들한테는 먹고 자고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만 하잖아. 그런데 마음이 아픈 사람한테는 사지 멀쩡한데 왜 집에 누워만 있느냐고, 밖에도 나가도 운동도 좀 하라고 그러잖아 사람들이. 그런데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마음도 다쳤으면 치료를 해야 하는 거고,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예요. 예란씨가 밖에서 씩씩하게 웃으면서 잘 지낼 수 있었으면 여기 왔겠어? 그리고 특히 예란씨는 항상 긴장을 하고 있으니까 좀 그렇게 지내도 돼.





원래 먹던 것에서 한 알이 추가된 약봉투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 말을 되뇌었다. 예란씨, 그래도 돼요 그래도 괜찮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들 하지. 지금의 내 세계가 딱 그래. 그런데 선생님은 그 세계를 괜찮다고 말씀하셨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래도 되는 거라고.     


이전에 침대에 누워 방 창가 쪽에 위치한 책상을 바라보며 생각한 적이 있다. 두 걸음만 떼면 저기 닿을 수 있는데 왜 그러지를 않느냐고. 왜 저기 앉아 책을 읽든 노트북을 하든 뭐라도 하지 않느냐고 너 정말 너무 한심하다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런데 실은, 가지 않은 게 아니라 못가는 거였어. 겨우 그 두 걸음이, 지금의 나에겐 너무 벅차서. 거기까지 닿을 마음의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아서 그런 거였어 그러니까········ 좀 그래도 된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예란아.       

-


병원을 방문한 다음날, 나는 도서관에 가 브런치에 올릴 글을 마무리 짓고 무사히 발행했다. 그 다음날은 또 꼼짝없이 온종일 잤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다시 도서관에 가려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렇게 나갈 채비를 다 마치고서··· 다시 침대에 누워 잤다. 너무 졸리더라고. 눈을 뜨니 오후 4시였고, 아, 오늘 하루는 공쳤네. 느적느적 일어나 마트에 가 생수를 사고 좀처럼 먹지 않는 아이스크림도 하나 얹어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의 에너지가 왔다갔다하나보다. 있었다가 없었다가 조금 있었다가 거의 없었다가.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오히려 한결 좋다. 편하다. 아마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알약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온종일 잠만 자도, 나갈 채비를 다하고서 다시 침대에 누워도, 하루 종일 한 일이라곤 30분가량 책을 읽고 스트레칭 10분 한 게 다라고 해도, 우울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왜냐하면 좀 쓰러져있어도 괜찮다는 걸 알았으니까. ‘쉬는 게’ 아니라, 그저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있어도 된다고, 스스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약이든 상담이든 시간이든 충분한 잠이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든, 황폐해진 마음에 차곡차곡 양질의 양분을 주어 다시 에너지가 자라날 때까지는 좀. 그리고는 다시 일어서면 된다고.      


그러니 나 자신에게, 그리고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다시 한 번 말해주고 싶다.      


우리, 스스로에게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아요.

김아무개씨, 좀 그러고 있어도 괜찮아요. 

분명, 다시 괜찮아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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