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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Mar 04. 2021

“아버지, 우리에게 사과하세요.”

씨발, 왜 어른들은 사과를 할 줄 몰라?


“아버지, 우리에게 사과하세요.”      


이를 꽉 깨물고 눈을 부릅뜬 채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말하던 문소리의 목소리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메아리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아버지, 우리에게 사과하시라니. 어쩌면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줄곧 그렇게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세자매>는 어릴 적 트라우마가 후에 어떻게 발현되는지 보여준다. 아버지의 폭력과 사람들의 방관이 뒤섞인 끔직한 기억이 무의식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영화에서 세 자매는 아버지의 생일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식탁 앞에 모인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의 하얀 식탁보만큼 아버지는 정갈하게 기도를 올린다. 하느님, 우리가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식사할 수 있게 해주어 감사드립니다. 그때였다. 정신이 아픈 막내아들이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하는 아버지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바지 지퍼를 내린 후 오줌을 갈긴 건. 아들은 발악하며 다 너 때문이라고, 네가 다 망쳤다고 소리 지르며 바닥에 나뒹군다.

         

문소리는 그런 동생을 격하게 질책한다. 너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이리 좀 나와 보라고, 그를 매서운 손길로 때린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문소리를 멈추게 한 건 다름 아닌 아버지가 사과하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식사 자리에 함께 있던 목사에게 이런 소란을 만들어 정말 죄송하다며 저 뒤에서 연신 허리를 굽혀 사과한다. 문소리는 동생을 때리던 손길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아버지에게 한 자 한 자 짓이기듯 말한다. 아버지, 목사님에게 사과하지 말고 우리에게 사과하시라고. 우리에게 사과하라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다 결국 무릎을 꿇고 오열한다. 문소리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맞는 첫째와 막내를 두고 도망쳤던 어린 자신의 모습이.



전에 아빠가 술에 취해 “너를 낳은 건 내 인생의 가장 큰 오점”이라고 내게 말한 적 있다. 내 코앞까지 다가와 유년시절에 그랬듯 나의 뺨을 금방이라도 후려갈길 듯 투박하고 두툼한 손을 높이 들어 올린 채로. 나는 순간 두려움에 무릎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좋겠다.’ 아버지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서 좋겠다. 너를 낳은 건 실수였다니 뭐니 그런 소리를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입장이어서 좋겠다고. 나는 그저 태어나보니 당신 같은 사람이 부모인데 어떡하라고. 눈을 떠보니 부모가 당신인데 그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아버지 당신이 생각 없이 낳아 폭력과 폭언과 방치로 키워내 현재 우울증 약으로 간신히 삶을 버티고 있는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는 그때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 서서 눈앞의 남자를 끝까지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을까. 약으로도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우울이 몰려온 밤이었다. 나는 그날 밤 아버지에게 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전에 당신이 나를 낳은 건 인생 최대의 오점이라고 한 그 말이 맞았다고. 나는 애초에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고. 당신 말이 다 맞았노라고. 몇 분 내로 회신이 왔다. “이제 최대의 즐거움이 되어주면 안 되겠니?” 순간 얼이 빠졌다. 뭐······? 나는 몇 초간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읽고 또 읽었다. 어쩌면 그 말을 이해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미안하다는 말도,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도 아니었다. 사과는커녕 그는 자신이 한말을 그대로 인정하며 나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너는 내 인생 최대의 오점이 맞으니 이제부터라도 최대의 즐거움이 되어주면 안되겠느냐고. 나는 그날 울다 과호흡이 와 119에 산소 호흡기를 낀 채로 실려 갔다. 도마 위에 올려놓은 물고기처럼 아가미를 크게 열고 닫기를 반복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토해냈다. 그래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씨발, 왜 어른들은 사과를 할 줄 몰라?
    

영화에서 결국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는 문소리의 아빠에게 손녀는 빽 소리를 지른다. 씨발, 왜 어른들은 사과를 할 줄 모르냐고. 할아버지 사과하시라고. 그렇게 아버지의 생일상은 엉망진창이 된다. 한쪽에서는 막내아들이 나뒹굴고 앞에서는 둘째 딸 문소리가 엉엉 오열하고 있다. 그 와중에 첫째 딸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져 상황은 다시 한 번 왈칵. 그야말로 엉망진창 뒤죽박죽.


그래서, 문제의 아버지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네 남매에게 사과를 했을까? 아니, 이 영화는 영화인 동시에 현실이었다. 아버지는 사과하는 대신 유리창에 자신의 머리를 쾅쾅 쥐어박는다. 피가 뚝뚝 떨어진다. 미안해서였을까. 그것 역시 아니. 그는 자식들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목사에게 이런 수치스러운 장면을 보였다는 창피함과 박살난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어찌하지 못해서, 그리고 이 상황  자체를 회피하고 싶어서 유리창에 머리를 쥐어박기로 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나의 음에서도 피가 뚝뚝 흘렀다.


우리 아빠는 언젠가 사과를 할까. 8살이었던 내가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내 뺨을 후려갈긴 것에 대해, 언니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쇼파에 몇 번이고 쥐어박았던 것에 대해, 저런 년은 뒤질 때까지 패야 한다고 소리친 것에 대해, 엄마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다 결국 엄마를 신용불량자로 만들었던 것에 대해, 덕분에 집에 빨간 딱지가 붙을 정도로 가난해져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설움과 고생을 안겨준 것에 대해, 언젠가 사과를 하는 날이 올까.


아니.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62년생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장남 김하식씨는 우리에게 결코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 말한 것처럼 그런 어른들은 사과를 할 줄 모르니까.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나는 그리 되지 않 것. 사과를 할 줄 모르는 어른으로 자라지 않을 것. 초등학생의 아이에게도 내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 줄 아는 어른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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