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루와 알려줄게.
때는 바야흐로 2018년 어느 볕 좋은 가을날. 언니와 함께 피크닉 장소에 도착해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옆에 계시던 할머니 무리께서 나보고 남자친구와 함께 왔느냐며 물었다. 아니라고 답하는 내게 할머니들은 대뜸 어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요즘 애들은 왜 아이를 안 낳는지 모르겠다고,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했는데 요즘 애들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모호한 표정을 짓고서 다만 언니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결혼, 출산, 임신, 아이, 그리고 이기적······. 나는 그날 이후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욕을 먹더라도, 언젠가 이 주제로 반드시 글을 적겠다고. 그리하여 드디어 때가왔다. 왜 요즘 여자들이 애를 낳기 싫어하는지 말할 때가 말이야.
왜 아무도 이렇게 힘든지 안 알려 준거야?!
어린 나이에 결혼해 현재 임신 중인 두 명의 친구는 같은 말을 외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대체 왜 학교 성교육 시간에는 임신하면 배만 부르고 출산의 고통만 있는 것처럼 가르쳤느냐며. 그도 그럴 것이 한 명은 일명 ‘토덧’으로,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매스껍고 토기가 올라와 먹는 족족 토를 하는 증상을, 나머지 한명은 그와 반대 현상, ‘먹덧’으로 식욕을 억제할 수 없는 증상을 겪고 있다.
전자는 그래도 아기를 위해 뭐라도 먹어야 하니 토기를 참아내고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것이 정말이지 고역이라고, 하루라도 속이 매스껍지 않은 날이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며 진저리를 쳤다. 후자는 어느 날 갑자기 자다가 참치 비빔밥이 먹고 싶어 새벽 3시에 일어나 밥그릇 가득 비빔밥을 퍼먹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서러워 그만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의지로 스스로의 몸과 의식을 통제할 수 없는 그 기분은 말로 설명 하지 못한다고. 자신이 인간 그 이하의 것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고, 그 사실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싫어서, 그런데 그 와중에 참치 비빔밥은 너무나도 맛있어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또 호르몬의 변화로 이유 없이 기분이 우울했다가 서글펐다가, 작은 것에도 화가 난다고 했다. 그런 후 돌아보면 그런 자신이 너무나도 유치해서 서글프고, 스스로도 왜 이러나 알 길이 없어 다시 화가 난다고.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내 감정인데 스스로 통제할 수가 없어서 기분이 곧잘 엉망진창이 된다고. 그러다가 이런 감정이 아이에게 전해질까 죄책감이 마저 든다고.
어디 그뿐이랴. 정신은 정신대로 힘들고 육체는 육체대로 고통을 호소한다. 무거운 배가 방광과 장기를 짜부라트려 무얼 먹든 소화가 되지 않고 밤에는 소변을 보러 몇 번씩 일어나 잠을 설친다. 부른 배 때문에 똑바로 누워 잘 수 없고 모로 누워 겨우 쪽잠을 잔다. 배가 불러 올수록 온 몸이 퉁퉁 부어 손가락조차 구부리기 힘들고 다리가 저려 30분 이상 서있을 수조차 없다.
호르몬의 영향으로 끔찍한 소화불량과 변비로 고생하고, 생전 안 생기던 여드름까지 덕지덕지 생긴다. 겨드랑이와 입주변의 피부가 검게 착색되고 가슴은 돌덩이처럼 무거워진다. 허리가 끊어질 듯한 요통과 골반 통증은 물론,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감과 이따금씩 찾아오는 가진통까지. 그야말로 온 몸을 펄펄 끓는 가마솥 속에 집어넣었다 뺐다 반복하는 것 같단다.
으으, 정말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 하루라도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매스꺼우면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건만. 며칠만 잠을 설쳐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거만. 그런 날이 몇 개월씩 지속된다니. 동시에 생리 전 때와 같이 내 몸을, 내 정신을, 내 욕구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나날이 무려 10개월 간, 그러니까 약 300일 동안이나 지속된다니. 더 끔찍한 건 그런 상태로 만삭 전까지 계속 회사에 다녀야 한다니! 정말이지, 영화 <툴리>에서 셋째를 임신한 만삭의 여주인공에게 지인이 “좋아 보이시시네요.” 라고 한 말에 주인공이 그리 답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정말요? 쓰레기 난파선에 탄 기분인데”라고 답한 이유를.
2018년 스브스(sbs) 뉴스에 따르면 기혼 여성의 약 50%, 즉 2명 중 1명꼴로 경력단절을 경험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경력단절 후 재취업하기까지 평균 8년이 걸린다고 한다. 실제로 육아휴직을 내겠다고 하니 권고사직을 강요한 회사부터, 면접 시 결혼과 출산계획을 묻는 회사, 자녀가 있는 여성에게 “(취업을 하면)아이들은 어떡할 거냐”고 묻는 면접관들까지.
슬프지만 이게 바로 대한민군의 현 주소다. 국가에서는 아이를 낳으라고 노래를 부르고, 아이를 낳지 않으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데, 막상 낳으면 회사에서 얄짤 없이 잘리고 후에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땀과 열심으로 쌓아올린 모든 커리어는 한순간에 외면 받고, 아이를 낳고 키웠던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보상받지 못한다. 심지어는 육아에 투입되는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을 ‘맘충’이라는 단어로 폄하 당한다. 이런 사회에서 누군들 마음 편히 임신을 하고 육아를 할 수 있을까.
정문정 작가의 에세이 <더 좋은 곳으로 가자>에서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내의 옷을 사기 위해 남편이 아이를 안고 기다리고 있고, 아내가 옷을 고르고 있는데 옷가게 직원이 “저기 아이 안고 기다리시는 분이 남편 분이세요? 어머, 저런 남편 정말 흔치 않은데. 남편에게 감사하셔야겠어요.”라고 했다고. 그리고 다른 매점에 들를 때마다 직원들에게 똑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고. 남편에게 감사하세요.
그렇다면 상황이 반전 되었을 때는 어떨까. 이번엔 엄마가 아이를 안고 기다리고 있고, 남편이 옷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남편에게 ‘아내에게 감사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정문정 작가는 위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좋은 엄마 소리 듣는 건 국가 대표 수준이어야 하는데 좋은 남편이나 좋은 아빠 소리 듣는 건 동네 조기 축구회원 정도면 되는 것 같다”고.
실제로 맞벌이 부부 사이에서 남편이 집안일도하고 아이도 봐준다면 ‘좋은 남편’ 타이틀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같은 상황에서 아내에게는 그 누구도 ‘좋은 엄마’ 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엄마지. 아내가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건 당연한 풍경이기 때문에.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워킹맘’이라는 단어는 있어도 ‘워킹대디’라는 말은 없잖아?
또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해보자. 맞벌이 부부사이에서 어린 아이가 혼자 집에 남아있고, 엄마가 회식을 하러 가면 여자는 곧잘 ‘나쁜 엄마’가 된다. 어떻게 늦은 시각까지 아이를 혼자 내버려두고 회식에 갈 수 있느냐고. 이런 상황에서 여자는 스스로 큰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암묵적으로 육아에 대한 기대와 부담은 여자에게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남자는? 남편에게도 어떻게 아이를 놔두고 회식에 올수가 있느냐며 누군가 비난을 할까? 못마땅해 하는 눈초리를 보낼까? 스스로 아이에 대한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남편이 하는 회식은 먹고 마시러 가는 게 아니라 업무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편은 어떤 부담도 없이 그저 회식 분위기 속에 잘 녹아들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전업주부일 경우엔 어떨까. 정문정 작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남편이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경우라 해도, 전업주부인 아내는 집안일의 대부분을 맡는 걸로 이미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공동의 일인 육아까지 아내의 몫이라면 남편은 아빠로서 무슨 역할을 하는 걸까. (중략) 가정에서 여성이 하는 일은 그 가치를 자주 폄훼당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벌어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아기 엄마의 집안일은 다음과 같다. 아기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의 반복. 퇴근도 없고 휴일도 없다.
만약 비슷한 업무를 경제적으로 환산하면 어떨까? 비슷한 일을 하는 입주형 산후도우미를 고용하려면 주 6일 근무에 한 달 기준으로 300만 원 이상 든다. 운 좋게 평일에 양가 어른 중 한 분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공짜가 아니다. 이 경우에도 한 달에 100만원 원가량 드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사도우미나 베이비시터를 고용하려 해도 시급 만 원이다. 가사노동의 가치를 경제적 비용으로 환산하면 이 정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내가 가사와 돌봄 노동을 전담하는 건 돈을 모으고 있는 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전업주부를 집에서 편히 돈 쓰는 사람으로만 여기는 분위기는 여전해서 여성들은 자꾸 자존감이 낮아지고 옅어진다."
언젠가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 있다. 엄마, 만약에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선택지와 ‘그냥 아예 태어나지 않는’ 선택지가 있다면 뭘 고를래? 그러자 엄마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했다. 나는 그때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지독한 모순. 자신조차 이 지난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거부하면서 도대체 애는 왜 낳은 거람.
<모든 아이는 부모의 이기심으로 태어난다>는 제목의 글을 쓴 적 있다. ‘아이를 위해’ 아이를 낳는 부모는 세상에 없으며, 결국 자신의 자기만족이나 더 나은 삶의 형태, 더 행복한 미래의 모습을 꿈꾸며, 아이를 진지한 고민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는 요지의 글이다.
한 번도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한 적 없다. 행복한 순간도 있었지만, 행복은 그야말로 인생에서 정점과 같고, 불행과 고난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직선과 같다. 사람은 누구나 자아가 형성될 무렵부터 ‘생계’와 ‘인간관계’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앞의 생을 등에 짊어지고 죽음을 향한 레이스를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아니 종종 내 등에 짊어져있는 이 짐이 너무도 버거워 세상을 뜨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이 레이스를 도중에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셀 수도 없이.
그래서 한때는 부모를 강렬히 원망했다. 아무 생각 없이 아이를 낳아 자기감정대로,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며 키우고 후에는 이 모든 상처와 트라우마와 생(生)이라는 짐을 나에게 떠넘긴 것에 대해. 그러고선 나 몰라라 하는 것에 대해.
나는 한 생명체를 이 고해의 바다에 내던져놓고 이토록 무거운 ‘삶’이라는 짐을 평생토록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 세상은 점점 살기 힘들어 지는데, 그런 세상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다. 후에 아이가 왜 자신을 낳았느냐고,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숨이 막힌다고 말을 해도 나는 그 짐을 내가 대신 져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건 자기 앞의 생이므로 오로지 본인만 짊어질 수 있고, 짊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그러므로 애초에 나 좋자고, 우리 부부 행복하자고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
<더 좋은 곳으로 가자>에서 정문정 작가도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이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부모는 일방적인 선택으로 아이를 세상에 초대한다. 아이는 태어나게 해달라고 부모에게 부탁한 적 없고, 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다. 십대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 중 ‘낳음 당했다’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아이를 낳으려고 해서 부모가 된 게 아니고 아이가 와준 덕택에 부모가 되었다. 그런데도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낳아준 걸 감사해라.” 양육은 선택 사항이 아닌 의무임에도 또 이렇게 말한다. “키워준 걸 감사해라.”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감사해야 하는 쪽은 부모가 아닐까, 라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이 고해 속에서 아득바득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을 쳐온 자식에게 살아줘서 고맙다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양팔과 다리를 힘껏 내저으며 이제까지 버텨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후, 욕을 먹을 때 먹더라도 하고픈 이야기들을 다 꺼내놓아 마음이 후련하다. 위의 사유들이 아이를 낳기 싫어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다 대변해준다고는 말 못해도, 어느 정도의 접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요즘 여자’들의 마음과, 답답한 이 땅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