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k가 블랙기업에 들어갔다
친구 k가 블랙기업에 들어갔다. 전 직장에서 퇴사를 하고 몇 개월간 취업준비를 하다 들어간 곳이었다. 네임밸류, 보수, 근무 환경 모두 썩 괜찮은 조건이었기에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k는 크게 기뻐했고, 짝짝짝, 나도 손뼉을 마주치며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시점, k는 ‘이 회사 뭔가 이상하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내용인즉슨 일단 구성원 모두가 자기 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아무도 자신에게 인수인계를 제대로 해주지 않으며, 일단 일을 해보고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는 식이라고 한다. 게다가 들어 온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지난 사업의 최종보고서와 올해의 사업계획서, 예산 정산 및 편성 등 신입이 맡기에는 첨예하고 중요한 일을 덥석 자신에게 던져주고 막무가내로 해오라고 했다고. 덕분에 입사한 지 이틀 만에 야근을 했다는... 다소 황당한 소식을 전했다.
친구는 일단 주어진 일에 착수하긴 했으나, 도대체 이 시스템이 어떻게 굴러가는 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최 감이 잡히질 않는다고 했다. 더군다나 사수에게 물어보면 그는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며 ‘하... 지난 문서 찾아보세요’로 일괄해 자신을 쭈구렁탱이로 만든다고도. 나는 일단 들어간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한 달 동안은 적응 기간이라 생각하고 힘들어도 버텨보자고 얘기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악화되었다. 2주가 지났을 무렵, k는 뜬금없이 기관 홍보 담당자가 되어 당장 영상 업체와 계약해 홍보영상을 만들어야 했고, 그 다음 주부터는 사업에 필요한 전문가 변호인단을 직접 섭외해야 했다. 그 와중에 자신에게 꽂히는 동료들의 텃새와 뒷담을 참아내야 했다. 그리고 입사 한지 딱 한 달이 되었을 때, 그녀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정말 그만두고 싶다고, 너무 일이 많아 화장실 갈 새도 없고 사람들의 냉소를 견디는 것도 너무너무 힘들다고 수화기 너머로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당장 회사를 박차고 나올 만큼 그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여자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나이 스물일곱에 신입으로 회사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시국에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는 게 사막에서 오하시스를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희귀하고 고된 일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한 달 내내 몇 평 남짓한 원룸 자취방에서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조금만 더 버텨볼까. 내가 너무 나약한 게 아닐까.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고 느꼈음에도 그녀는 쉽게 그만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달 하고 다시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그녀는 한 층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예란아, 나 이제 그냥 ‘될 대로 되라’ 상태야, 오늘이라도 당장 사표를 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다니고 있어. 진심이야. 나는 오늘이라도, 내일이라도 언제든 수틀리면 사표를 내고 다 때려치울 거야. 그러니까 어느 날 나 관뒀다고 말해도 너무 놀라지마.”
나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격하게 고개를 끄떡이며 큰 소리로 답했다.
“그래,k야! 그런 마음이야!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는 마음! 그런 마음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해!”
나는 이전에도 이런 대화를 마주한 적이 있다. 전 직장에서 타부서에 있던 신입이 악덕 상사로 몹시 고생하고 있었던 때의 일이다. 나는 어느 날 아무도 없는 회사 탕비실에서 그와 마주쳤고, 그에게 또라이 같은 상사 때문에 고생이 너무 많으시죠, 어떡해요... 라고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에이 뭐, 정 못하겠으면 그냥 택시타고 도망쳐버리죠 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에게 되물었다
“네? 진심이세요?”
그는 내 물음에 이게 뭐 대수로운 일이냐는 듯 가볍고 무심한 투로 답했다
“네 그럼요, 저는 지금이라도 당장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걸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어요.”
나는 약간 어안이 벙벙한 채로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말에 반응했다.
맞아요, 정말로 그러네요! 우리는 언제든 떠날 수 있어요. 언제든 지갑을 챙겨서 택시를 타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이 언제든지 자신이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정답은 이거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환기되지 않으면 삶이 너무 힘들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오래 못할 거 같아요.
배우 김태리는 한 매거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이 일에서 언제든 도망할 수 있다는 마음을 한구석에 품고 있어야 한다. 모든 걸 멈추고, 언제든 지갑을 챙겨 택시를 타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이거 아니면 안 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스스로의 정신과 육체를 망쳐버린다. 절실함을 넘어 절박해져버리고 말아서 이성은 마비되고 시야는 좁아진다. 더 이상 내가 이것을 왜 하는지,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좌우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오로지 한 곳만 맹목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 절박함은 곧 집착과 강박으로 이어져 스스로를 옥죄는 올가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인생은 그것이 잘 되었을 때와 잘되지 않았을 때로 이분화 되고, 주변의 무수한 새로운 가능성들은 빛을 잃고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결국 그것은 나 자신이라는 사람을 대변하는 무언가가 되어, 그것이 잘 되지 않았을 경우 크게 좌절하면서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나는 이것에서 언제든 도망할 수 있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자신의 몸과 정신을 지키며 오래도록 어떤 일을 할 수 있다. 지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주변의 새로운 가능성들과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으며 걸어갈 수 있다. 그것과 자신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는 틈이 생긴다. 그렇게 적당한 거리감과 밸런스를 유지해야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고 건강하게 일상을 건너갈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내 일터와 글에서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달랑 카드 한 장 들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