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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아니라, 나선을 걷고 있습니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문장

by 김예란


고백하나 해볼까.


나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폭풍처럼 해내는 이들을 꽤 오랫동안 부러워해왔다. 왜, 18학점 다 들으면서 아르바이트는 물론 동아리 활동과 공모전(자격증) 준비, 주말에는 스터디 모임과 연애까지 빼놓을 수 없다는 듯 척척 해내는 친구들 있잖아. 다채로운 경험 자체가 곧 스펙이 되는 시대에서 그런 친구들은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인재상’ 자리를 단숨에 꿰어 찼다.


나는 왜 저렇게 될 수 없을까


으레 그렇듯, 동경과 부러움이 민들레 홀씨처럼 부풀었다 날아간 자리에는 자괴감과 자책이 뒤따랐지만.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로 종횡무진 뜀박질을 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 번에 기껏해야 2가지 일만을 겨우 해내는 스스로가 구식 자동차가 된 기분이었다. 연비가 영 구리다는 소린데.


대학교를 다닐 적에는 정규수업에 포함된 과제와 팀플, 시험준비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 남짓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빴다. 스터디나 동아리 등 그 외의 활동은 아르바이트 대신 교내근로 장학생으로 생계수단을 바꿔, 시간과 에너지를 확보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근로 장학생을 하면 수입은 반 토막 나지만)


같은 직장인인데도 무서운 속도로 글을 써 출간에 골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는 하루에 한 문단조차 쓰기 버거운 날들이 많았다. 회사 업무만으로 과부화상태가 되어 모임이나 스터디 같은 건 엄두도 못 냈다.


간혹 찾아오는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다는 뿌듯함은 SNS 속 무수한 성취의 경험들을 마주하는 즉시 낯부끄러움으로 변모했다. ‘꼴랑 한 문단 적으려고 온갖 바쁜 척에 약속까지 미룬거야.......?’

유난이다, 정말.



그렇지만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에 대해 털어놓거나 고민상담을 한 적은 없었다. 당연하잖아. ‘다경험, 고성취자 우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시대에 손 안에 두어 개 밖에 쥐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고백은 스스로 연비가 꽝인 구식이라는 걸 밝히는 꼴이니까. 넓은 스펙트럼을 발품 파는 인재를 누구보다 선호하는 SNS시대에 착오로 떨어진, 촌스러운 외골수 아날로그 인간인 것만 같아져서.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고. 결국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스스로의 치부를 입 밖으로 시인할 수밖에 없는 일을 마주하게 되는데···.




때는 대학졸업 직후, 본가로 내려와 본격적인 취준생의 길을 걷던 시기로 거슬러 간다.

당시 아르바이트 자리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원하는 근무 시간대와 직종에 맞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세 번, 하루 5시간, 초중고등 학생 영어강사. 취업준비와 병행하기 손색이 없겠군. 다만, 딱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통근 시간이 편도 2시간···그러니까 무려 왕복 4시간의 대장정을 요구한다는 것······.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난색을 표하며 만류했지만 당시 난 이상한 오기로 차있었다.

매일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험 준비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야?
일주일에 세 번쯤은 나도 문제없다고.


내친김에 통근할 때 지하철에서 읽을 책도 한 아름 사두었고, 자격증 시험 접수까지 완료했다.



그렇게 야심차게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망했다. 그야말로 모든 게 엉망진창. 원서접수 마감기한을 맞추기 위해 퇴근 후 새벽 12시가 다 되어서 다시 책상에 앉았지만 이내 엎어져 졸기 일쑤였고, 커피로 간신히 졸음을 쫒아도 이미 지쳐버린 뇌는 작동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새벽 2-3시까지 자리를 지켰지만 자기소개서의 한문항도 쓰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다.


다음날 늦잠으로 인해 아침형 인간의 골든타임, 오전시간대를 몽땅 날렸으며, 자격증공부는커녕 사전수업준비를 하다 허겁지겁 버스에 몸을 싣기 바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진이 다 빠져 시체처럼 좌석에 널 부러져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런 와중에 책은 무슨, 우욱.

결국 자기소개서를 완성하지 못해 꼭 바라왔던 기업에 지원조차 하지 못하고, 신청해둔 자격증 시험에는 ‘어차피 떨어질 것’이라는 자기변명을 되뇌며 참석하지 않고. 겨우 한 달 만에 그만둬야겠다는 말을 학원원장님께 전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무릎을 꿇고 시인했다.


‘그래, 나 구식이야. 나는 느그들처럼 될 수 없어’


엉엉. 그때는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




애초 멀티가 불가하기에 성취의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단한 추진력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자신 있게 꺼내놓고 자랑할 만한 결과물도 없을 듯싶다. 분명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사실은 최선을 다해왔는데 왜 손안에 남은 건 이리도 얄팍하고 볼품없는지.


일본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의 엄마는 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따금씩 아무리 걸어도 원을 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고. 계속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늘 같은 지점에서 실패하는. 나는 당시 이보다 나의 인생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종 깊은 무력감과 회의에 젖어있었다.



그런 내게 어떤 희망보다 희망적으로 닿은 문장이 있다.

바로, 동일 영화에 나온 ‘나선이론’과 한수희 작가의 저서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의 서문이다.


영화에서는 항상 같은 자리를 돌며 원을 그리는 느낌이라던 주인공의 엄마는, “이제 보니 그건 원이 아니라 나선”이었다고 딸에게 편지를 쓴다. 늘 제자리걸음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아래로 위로 옆으로 이동하며 조금씩 더 큰 나선을 그리고 있었던 거라고. 어쩌면 인간 자체가 나선일지도 모르겠다고.

한수희 작가는 이 내용을 책에서 언급하며 "우리는 조금씩 처음에 그린 원에서 비껴가고 있다"고 말한다. 원에는 출구가 없지만 나선에는 출구가 있다고. 그리고 자신은 직선이 아닌 나선으로 걸었기에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노라고. 남들에게 권하고 싶은 인생도 아니고 딱히 자랑스러울 것도 없지만, "나는 그렇게밖에 걸을 수 없어서 그렇게 걸었던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나는 태어나기를 ‘좁고 깊게’ 났다.


사회적 활동 뿐 아니라 인간관계, 독서습관, 덕질의 대상까지 한 가지를 붙들면 오래도록 깊이 감상했다. 한 번 잡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기 전까진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며, 소수의 친구들과 끈질긴(?) 인연을 이어왔다. 좋아하는 영화는 일곱 번이나 봤고, 3년 전 덕질을 시작한 연예인을 아직까지 애정해마지 않는다. 식(食) 스타일마저 좋아하는 한두 가지 찬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뭐든 제대로 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읽은 덕에 한 번 본 책은 내용과 문장, 문맥을 그대로 기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속에 새겨진 문장들은 삶의 곳곳에서 발현돼 깊은 통찰을 제공해 주었으며, 기꺼이 훌륭한 글감이 되어주곤 했다. 핸드폰 속 저장된 이름이 많지는 않으나, 한번 인연을 맺은 이들과는 언제든 안부를 물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경험했던 소수의 대외활동과 인턴 등이 끝나갈 무렵엔 언제나 새로운 배움과 능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어떤 일이든 1인분의 몫을 다하고자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모전에 나가서도 어떤 상이든 꼭 한 개는 손에 쥐어왔다.



결국 나도 나만의 방식과 속도로 나선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늘 같은 지점에서 실패한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조금 더 높은 고도에서, 더 나아간 지점에서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점점 나선을 확장시카고 있었던 거라고. 남들보다 느릴지언정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단단하게 찍어가며.


또한 나는 늘 자책과 후회를 벗 삼으며, 과거로 돌아간다면 더 나은 모양의 나선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로 돌아간다 한들 비슷한 형태의 나선을 그렸을 것이다. 조금 다듬어지기야 하겠지만 전체적인 모양은 별반 다르지 않은. 왜냐하면 ‘좁고 깊게’는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나의 고유한 속성이자 재질이고, 그 속성과 재질로 빚은 발자국들로 지금 같은 모양의 나선이 만들어졌을 테니까.


그러니, 나라는 사람이 만들 수 있었던 최선의 형태가 지금의 나선이었겠거니.

나 역시 그렇게밖에 걸을 수 없어서 그렇게 걸었던 거겠지, 생각한다.



영화 < 리틀 포레스트 2 > 스틸 컷


세상에 원을 그리며 걷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난 대로, 각자의 방식대로 나선을 그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저마다의 나선은 DNA나 지문처럼 본인을 고스란히 담아내기 때문에, 분명 자신에게 맞는 경사와 고도가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다른 사람의 걸음걸이를 그대로 흉내낸다면 결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안다.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좌절하기 보다는, 내 발자국의 크기와 깊이, 보폭을 고려해 조금 더 ‘잘’ 걸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무작정 여러 일을 움켜쥐려고 하기 보다는, 주어진 일을 잽싸게 끝내고 얼른 다른 일에 착수하는 식으로.


그렇게 나름의 방식으로 걸음걸이와 속도를 개선하기도, 조율하기도. 때로는 그저 수긍하고 체념하기도 하면서 걷다보면 언젠가 나와 어울리는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영화에서 엄마의 편지를 읽은 이치코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당신들도 분명 그럴 수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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