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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Jun 15. 2021

잠깐만,
퇴사하기 전에 저것만 보고 가자!

  

디즈니 신작 영화 <크루엘라>에서 주인공 크루엘라는 우여곡절 끝에 최상위 명품 의류를 취급하는 백화점에 입사하게 된다. 하지만 백화점에서 디자이너가 되기를 꿈꾸던 그녀가 맡은 직무는 화장실 바닥 닦기, 쓰레기 버리기, 이불 세탁하기 등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청소부로 고용된 것.

 

불쌍한 크루엘라는 상사에게 틈만 나면 자신을 재봉실에 보내달라고 부탁해보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그렇게 상사에게 밉보이기만 한 상태에서 그녀는 사소한 실수를 하게 되어 상사 방으로 불려 가는데, 그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그녀는 아주 당당하고 뻔뻔히 이렇게 말한다.


“절 해고하시기 전에, 그 엉덩이 꽉 끼는 슈트 안에는 불쌍한 직원에게 빛나는 기회를 주실 따뜻한 마음이 숨어있을 거라 믿어요.”


상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 숨을 내쉬더니 해고 대신 자기 방이나 치우라고 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해고되지 않은 것에 감지덕지하기는커녕 청소는 대충하고 상사 수납장에 있던 술을 멋대로 꺼내 꼴깔꼴깍 마신다. 그리고는 백화점 쇼윈도에 비치된 옷을 치워버리고 자신의 작품을 휘갈겨 완성한 뒤 술에 꼴아 그대로 잠든다.


다음날 그 모습을 발견한 상사는 기겁을 하며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 거칠게 해고통보를 하는데, 그 순간. 전국에서 악명 높은 천재 디자이너가 백화점을 방문한다. 셀럽의 등장에 일동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크루엘라는 상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얼른 사물 뒤로 몸을 숨긴다. 그녀의 동료가 옆에 와 이틈에 얼른 도망가자고 하지만, 그녀는 천재 디자이너에게 눈을 고정한 채 이렇게 말한다. “잠깐만! 해고되기 전에 저것만 보고 가자.”



이 대목에서 나는 뜬금없이 깊은 감명을 받아버렸다. 세상에. 저렇게 뻔뻔하고 기가 막힐 수가.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대담하고 기세등등하다니.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바로 저거야. 저게 바로 우리 사회초년생들에게 필요한 자세야! 라고.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특히 사회초년생들은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을 하게 마련이다. 일단 나부터가 그런데(슬프게도 현재진행형이다). 능력이 부족해 팀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경우도 있었고 큰 실수를 해 상사가 발을 동동 구르게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내겐 사건을 수습하고 책임질만한 능력도, 권위도 없으므로. 다만 열심히 죄송해할 뿐.


그런데 어느 순간 자책의 기간과 정도가 심해져 스스로를 자주 갉아먹었다. ‘내가 부족해서 팀원들이 고생하고 있어,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나봐.’ ‘어떡해, 그런 실수를 하다니,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어.’ 회사에서 뿐만 아니라 회사를 벗어나서도 기가 죽어 마음이 철퍽, 가라앉은 채로 지냈다. 밥맛도 없어지고 잠도 못잘 정도로.


그날도 그랬다. 실수를 저질러 상사에게 왕창 깨지고 힘없이 지내고 있는데, 다른 팀의 상사가 와서 이런 말을 해주었다.


“잊어버려요 예란씨.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쩌겠어. 잊는 것도 의지고 능력이에요.”

그리고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 그걸 알게 됐는데, 예란씨는 좀 더 일찍 알았으면 해서.”


잊는 것도 의지고 능력이라고. 아, 그렇구나 그랬구나. 하긴, 매번 열심히 자책하고 괴로워해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여전히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몇날며칠이고 계속 끙끙 앓으며 죽은 사람처럼 지내봤자 내 정신과 육체의 건강만 망칠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답은 영화 속에 있었다. 그저 조금 더 뻔뻔해지는 것. 잘릴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 저것만 보고 가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조금 더 낯을 두껍게 만드는 것. 물론 영화는 현실이 아니므로 내가 잘못했음에도 어쩌라는 식으로 밀고 나가라는 게 아니다. 다만, 회사 안에서는 열심히 미안해하며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되, 회사 밖에서는 좀 어깨를 펴고 기를 세우고 다녀도 된다는 말이다. 뭐, 이미 일어난 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걸 뭐. 여차하면 잘리고 다른 회사 구하면 되지, 이렇게 마음을 먹고 씩씩하게 퇴근 후의 삶을 살면 된다.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고 운동을 가고, 책과 영화를 보며 친구들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좀 그렇게 지내도 양신에 털 안 나더라. 언제까지고 풀 죽어 있어봤자 괴로운 건 자신과 그걸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염치는 줄이고 배짱은 늘릴 필요가 있다고. 적어도 회사 밖의 삶에서는. 그러니까 나는 우리 사회초년생들이 조금 더 뻔뻔해지기를,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을 더 도닥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좀 어때. 쫄리면 자르시든가.


자, 그러면 오늘도 마음을 가볍게 하는 출근길의 주문을 외며 하루를 시작해볼까.

      

“잠깐만! 우리 잘리기 전에 저것만 좀 보고 가자!”     




p.s: 영화 <크루엘라> 정말 재밌어요! 완전 추천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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