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예란 Aug 03. 2021

당신은 어른이 되셨습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고 김예란은 김예란이로다, 랄까요.


   

저는 20살 때 분명히 제가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법적으로 성인의 나이가 되었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살며, 대학등록금, 생활비, 월세까지 전부 제 힘으로 마련했으니까요. 그런데 25살의 어느 여름날. 문득 머리를 감다가 ‘나는 언제어른이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20살적에는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자부하다가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시점에 언제 어른이 될까, 궁금해 하다니요.


어쨌든 저는 그 생각의 간극으로부터 오는 아이러니가 퍽 인상적이어서, 그로부터 줄곧 ‘어른’에 대해 생각해왔습니다. 어른이란 뭘까. 어떻게 어른이 되는 걸까. 어른이 된다면 그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당시 저는 어른에 대한 정확한 기준조차 제대로 정의할 수 없었지만, 내가 현재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 어른이라는 단어를 박아 넣은 채 시간이 흘러, 저는 어느새 2번의 직장생활을 끝낸 스물여섯의 끝자락에 도달했습니다. 그때 다시 직장을 구해야 했으니 한참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었죠. 그렇게 밤을 새가며 쓴 자기소개서를 메일로 보내고 나서, 저는 완전히 지치고 무감해진 상태로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어요. 아, 나 어른이 되었구나. 지금 나는 어른이로구나, 하는 것을요. 뜬금없이 갑자기 이 타이밍에서 웬 어른타령이냐고요? 설명해보겠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제 자신인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시겠지만, 그때 저는 비로소 제가 김예란인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실은, 이전까지는 제가 김예란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종종 혼자 이런 말을 중얼거리곤 했어요. ‘나는 왜 김예란일까.’ ‘나는 왜 김예란 밖에 될 수 없을까’ ‘그게 문제다 문제, 내가 김예란인 게 문제라고’


저는 이렇게 찌질하고 한심하고 무능력한 사람이 제 자신이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제가 20살 적 꿈꿨던 26살의 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매일 직장에서 눈치나 보고 실수하고. 꾸질꾸질한 모습으로 일주일 내내 야근이나 하는 사람이. 저는 제가 특별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주위의 인정을 받으며 착착 커리어를 쌓아가는 멋진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한테 존경이라는 것도 받고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런 사람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특별한 사람’이더군요. 저는 그런 사람이 ‘진짜 김예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소개서에 있는 경험 없는 경험 싹싹 긁어모아 어떻게든 그럴싸하게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게 진짜 나의 진실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별 볼일 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나라고. 그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멋진 버버리 코트를 걸치고 또각또각 구두를 신은 채 곱게 화장한 모습으로 바삐 미팅 장소에 가는 김예란은 대신, 매일 후드를 뒤집어쓰고 머리를 질끈 묶은 채 도서관에서 질질 짜며 자기소개서를 쓰는 내 모습이 진짜 김예란이라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물론 슬프고 처참했습니다. 자신이 주변에 둘러싸여 박수를 받는 주인공이 아닌 것은 물론, 주인공 옆을 지키는 조연도 아니고 그저 한낱 엑스트라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게, 참. 그렇지만 저는 그제야 제가 어른이 된 것 같았습니다. 허황된 모습을 꿈꾸며 현실의 나를 부정하는 대신, 그냥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볼품없고 초라한 김예란을 나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어른이 된 거라고요.


모르겠습니다. 다들 각자 ‘어른’을 정의하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저는 일단 ‘내가 김예란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부터 마음이 편해졌거든요. 내가 원하는 멋진 모습이 아니더라도 견딜 수 있고, 원하는 직무가 아니더라도 담담하게 할 일을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살이 쪄도, 이건 ‘살이 찐 나‘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고요.


그냥 이게 저입니다. 이런 글을 쓰고, 이렇게 밥벌이를 하고, 가끔 실수하고 종종 우울하고 자주 찌질해지는 인간, 그게 저입니다. 여기에 더 이상 반박할 마음이 없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고 김예란은 김예란이로다, 랄까요. 그냥 저는 뭐, 어쩔 수 없는 김예란인거죠.


언젠가 친구 J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J야, 나는 지금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해. 내가 나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거든. 내가 그냥 그저 그런 사람이고, 내 인생도 그냥 그저 그렇게 흘러갈 것임을 받아들였거든. 너는?
나는··· 아니야. 나는 아직 아닌 것 같아. 응, 나는 아직 못 받아들이겠어······.


자아, 그럼 당신은 진정 어른이 되셨습니까?

작가의 이전글 자전거로 사람을 치고 나서야 깨달은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