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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Oct 12. 2021

여성혐오는 바퀴벌레와 같아서
(feat 오징어게임)


있잖아, 바퀴벌레는 말이야. 어디에나 있어. 아무리 깨끗해 보이는 곳이라도 항상 존재하지. 어느 구석에 숨어 있다가 불을 딱 껐을 때 어디선가 튀어나와. 그래서 우리가 밟는 땅이든 벽이든 온갖 데를 다 누비고 다니지. 바퀴벌레는 그래. 정말로 어디에나 있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조용히.


요즘 전 세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봤다. 독특한 미장센과 화끈한 전개로 킬링 타임용으로 제격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여성을 이용하는 방식을 보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가 여성을 사용하는 방식은 7,80년대 매체가 여성을 그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성녀’ 아니면 ‘창녀’로 나누기. 주인공의 옆에서 그를 보조하며 주인공을 더욱 눈에 띄게 만드는 성녀역할 강새벽(정호연 분)과, 자신의 몸을 팔아 생존하는 창녀역할 한미녀(김주령 분)가 그 대상이다.


일단 눈에 띄게 여성혐오가 드러나는 부분은 감독이 한미녀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가혹한 서바이벌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팔아 강자에게 빌붙는다. 자신과 한 팀이 되면 당신과 섹스를 해주겠다고 살랑거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끝에서부터 온도가 내려가 머리전체가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21세기에 어떻게 저런 식으로 여성캐릭터를 소비할 수 있는지.


자신의 성을 팔아 쉽게 무언가를 얻는 모습은 여성 그 자체를 사고 팔 수 있는 재화로서 성 상품화 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감독의 머릿속에 어떤 여성혐오적인 시선이 자리 잡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여성은 불리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 자신의 몸을 팔아 쉽게 무언가를 얻는다’는 명제는 여성이 극한상황에서 얼마나 교묘하고 영악하며 추잡스러운 존재인지를 반영한다. 이것은 기안84가 웹툰 <복학왕>에서 어린 여성이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상사에게 몸을 판다는 이야기와 같은 선상에 있다. 이것은 자기 몫의 생계를 스스로 열심히 책임지고 있는 모든 여성에 대한 기만이다.


그리고 상상해보라. 실제로 그런 양육강식의 세계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이 강간당하지는 않을까, 해를 입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공포에 떨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몸을 담보로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남성을 유혹하겠는가. 이런 방식으로 여성 캐릭터를 소비하는 것은 단지 여성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만 재생산하는 꼴일 뿐이다.



그렇게 감독은 한미녀를 창녀로 묘사하면서 나중에는 불필요한 캐릭터(덕수)를 제거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버려버린다. 애초에 그녀는 어떤 주체성도 없이 그저 덕수를 없애기 위해 창조된 캐릭터인 것만 같다. 그 외에 그녀의 역할은 없으니까. 


자칫 강하고 주체적으로 보이는 강새벽 또한 마찬가지다. 강새벽은 서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직 주인공 성기훈(이정재 분)의 성격과 정의감을 돋보이기 위한 장치로 사용될 뿐이다. 실제로 그녀는 성기훈의 정의감을 불타오르게 한 후 허무하게 죽임 당한다. 전형적인 성녀역할이다. 결국 오징어게임에서 주체적인여성 캐릭터는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여성혐오는 이런 식으로 우리가 접하는 매체에, 몸담고 있는 생활 곳곳에 아주 교묘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스며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곳곳에, 조용히, 마치 바퀴벌레처럼 숨어서 우리의 무의식을 갉아먹고 선입견을 공고히 하며 또 다시 여성에 대한 어떠함을 재생산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단어를 바꾸어 말해볼 수 있겠다.


있잖아, 여성혐오는 말이야. 어디에나 있어. 아무리 깨끗해 보이는 곳이라도 항상 존재하지. 어느 구석에 숨어 있다가 불을 딱 껐을 때 어디선가 튀어나와. 그래서 우리가 밟는 땅이든 벽이든 온갖 데를 다 누비고 다니지. 여성혐오는 그래. 정말로 어디에나 있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조용히 도사리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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