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럴 수가, 그녀의 mbti는
엄마랑 나는 참. ‘안 맞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안 맞다. 생각, 행동, 반응, 가치관, 취향, 취미, 특기 뭐 하나 일치하는 게 없고, 같은 사물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다르게 인식한다. 그래서 서로의 의중을 못 읽어낼 때가 많았고, 부모와 자식 간에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그로인해 우리 사이엔 늘 갈등과 오해 분노와 설움이 봄날의 미세먼지처럼 촘촘히 끼여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언니와 나, 엄마, 세 모녀가 간만에 모여 호캉스의 첫 날을 보내던 날. 우리는 호텔 체크 인 전에 근처 카페에 들러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테이블을 잔잔히 메우는 아메리카노의 포근한 향과 디저트의 달콤한 내음에 나는 실로 오랜만에 긴장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당시 나는 지옥 같은 회사생활을 견디느라 항상 고통에 절여져 있었고). 그런데 그것도 잠시, 엄마가 뜬금없이 내 책에 달린(나는 지난해 10월 첫 에세이를 출간했다) 악플을 화두로 꺼냈다. 인터넷 서평을 찾아보니 이런 말도 있더라. 악플을 읽어주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해맑았지만 그걸 듣는 내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급기야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그 이야기를 내게 하는 저의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 굳이 딸한테 악플을 찾아 읽어주는 이유가. 내가 상처 받기를 원하느냐고. 엄마는 오히려 내 반응이 당황스럽다는 듯 왜 우냐고, 나는 그냥 네가 다음 책을 쓸 때 참고하라는 목적으로 말해준 것뿐이라고 했다. 어이가 카페 창문을 뚫고 가출해버렸다. 세상 어느 누가 악플을 읽고 다음 작업에서 더 좋은 결과물을 낸단 말인가.
말문이 막힌 나는 테이블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없이 눈물만 떨궜고, 엄마는 눈치를 살피면서도 ‘네가 왜 우는지를 모르겠다며’ 자신의 ‘선의’를 착실히 설파했다. 결국 언니가 해결자로 나서 ‘제발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이러지 말자’고(이 호캉스의 주도자는 언니였다) 몇 십분 간 절절 호소한 끝에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호텔에 입성한 후에도 불어터진 물만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언니는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같이 mbti 검사를 해볼 것’을 제안했다. mbti란 사람의 성향을 16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정의하는 성격테스트로, 일전에 나는 infj로 분류된 바 있다. 언니의 유형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으나(예상대로 그녀는 isfp였다), 엄마의 것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호기심이 동했다. 이윽고 나온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럴 수가, 그녀의 mbti는
estp
나와는 완벽히, 완전하게 정반대였다.
이렇게까지 나와 상극인 유형을 본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일치하는 게 하나도 없을 수가.
I(내향) <-> E(외향) / N(직관) <-> S(감각) / F(감정) <-> T(사고) / J(판단) <-> P(인식) 이므로, 말하자면 ‘나’라는 사람을 180도 뒤집어 놓은 게 엄마였다. 서로 어지간히 안 맞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객관적인 지표가 눈앞에 들이닥치니 신선한 충격이 몰려왔다. 그리고 충격과 동시에 깨달았다. 아. 엄마랑 나는 같은 인간의 형태를 가졌지만 실은 전혀 다른 종류의 개체였구나!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나는 엄마랑 갈등이 있을 때마다, 서로 안 맞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엄마가 ‘틀려서’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 엄마는 ‘종종 무례하고 무심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부족하며 그러므로 언행이 몹시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사람이었고, 그건 엄마가 ‘생각이 짧아서’ 또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보니 우리 둘은 사고회로 자체가 완전히 다르게 생긴 것뿐이었다.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사고의 설계도와 뇌의 매커니즘이 애초에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자면 수식 자체가 다른 두 함수였던 것이다. A라는 같은 자극을 주더라도 나는 B라는 반응을(f(A)=B), 엄마는 C라는 결과 값을 내놓는 함수(f‘(A)=C)였던 것. “오늘 너무 힘들어서 폭식했어.”라는 자극을 받았을 때, 나의 사고회로는 자연스레 “뭐 때문에 힘들었는데?”라는 결과값을 도출하지만 엄마의 회로는 “살찌겠네, 뭐 먹었어?”라는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건 엄마가 생각이 짧아서도,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식에 따라 연산을 마쳤고, 삐빅- 그 값은 정상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한 후로 나는 ‘모든 인간관계가 꼭 이해를 전제로 성립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선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옆에 있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왜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런데 애초에 내 기준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한 사람들이 있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도 있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싶은 사람들. 내재된 하드웨어 자체가 나와는 다른 기종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는 이해를 포기해야 한다. 인정하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나는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언행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를 뿐. 그런 관계에서는 이해가 아니라 ‘받아들임’과 ‘학습’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 책을 쓸 때 참고하라고 악플을 읽어주는 엄마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의할 순 없지만 엄마는 그런 생각을 가졌구나.” 그냥 받아들이기. 그리고 학습하기. “엄마는 저런 생각으로 말을 하는구나. 그러니까 상처받지 말자” 반대로 엄마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쟤가 우는 이유를 이해할 순 없지만 쟤는 저렇게 느끼는 구나” 그리고 학습하기 “이런 말을 했을 때 쟤는 상처받으니까 앞으로 주의하자”
이해가 안 되면 외워라고, 수학공식을 가르칠 때 흔히 말하지 않던가. 어쩌면 인간관계도 이와 비슷할 지도 모른다. 이해가 안 되는데 어쩌겠어. 그냥 받아들이고 외워야지. 실은 나와 하나부터 열까지 안 맞는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 사람이 내 가족일수도 직장 상사가 될 수도 있으므로. 그럴 때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보다, “음, 저 사람은 저렇군.”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메모해 놓는 것이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이로울 거 같다. 아무래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