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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Jul 11. 2022

이다지도 작고 하찮은
버킷리스트에 대하여


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리스트     


너의 버킷리스트는 뭐야?, 하고 물으면 친구들은 ‘과연 버킷리스트답군’ 싶어지는 대답들을 내놓곤 했다. 남극에 가서 오로라 보기, 자신의 책을 펴내고, 베스트셀러 되기, 네덜란드에서 한 달 동안 살기 등등. 다들 거창하고 그럴싸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 아주 하찮고 소박한 버킷리스트를 가진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바로 우리 엄마, 정여사이시다.


지난 주말, 정여사께서는 친히 내가 자취하는 집을 방문하시어 하룻밤 묵고 갔다. 그때 그녀와 함께 광안리 바닷가를 걸었는데, 문득 엄마가 스티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한 말이 기억나 근처의 스티커 사진샵에 들어갔다.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머리에 이런 저런 머리띠를 써보았다. 나는 이깟 스티커 사진이 뭐라고, 생각하며 푸슬푸슬 웃었다. 어쨌든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신이 났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느즈막이 일어나 브런치를 먹으러 나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바질 크림 토마토 샌드위치를 천천히 먹고 있는데, 엄마가 문득 감격스럽다는 듯 말했다. “여기서 내 버킷리스트 2가지를 이루고 가는구나, 스티커 사진 찍기랑 바닷가에서 브런치 먹기!”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어제 찍은 스티커 사진과, 브런치를 핸드폰 카메라로 정성스레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무척 들떠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서 미안한 감정이 찌르르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소박하고 하찮은 버킷리스트라니, 이게 뭐라고······. 그녀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아주 손쉽게 이룰 수 있는 일들을 버킷리스트로 두고 있었다. 그말인즉슨 그녀를 기쁘게 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건데 이제까지 그에 대해 별 생각도, 관심도 없었다는 사실이 나의 양심을 콕콕 찔러왔다. 동시에, 나는 이렇게 소박하고 작은 버킷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나에게 있어서는 별일 아닌,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소중하고 간절한 버킷리스트들을 가지고 있을까.


몸이 아픈 이들은 평일에 햇볕을 쬐며 찬찬히 산책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일 수도 있겠지? 자신의 두 다리로 걷는 게 버킷리스트인 사람들도 있을 거야. 또 어떤 이들은 제주에 가보는 게 소원인 사람들도 있겠지. 그것뿐일까. 어떤 이들은 치킨을 배불리 먹는 게, 또 다른 이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게, 또는 그저 남들처럼 평범히 살아가는 게 평생의 바람일 수도 있을 거야. 그런 사람들도 있는 거야. 내가 언제든 쉽게 이룰 수 있는 일들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는 사람들.



언젠가 ‘로제타’라는 영화를 본 적 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이렇다. 주인공 로제타는 회사 계단을 미친 듯이 내려가며 누군가에게 쫒기고 있다. 그녀는 다름 아닌 회사 경비원들에게 쫒기는 중이다. 이유는 바로 해고를 받아들이지 못해 난동을 피웠기 때문에.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며 대항하는 그녀는 필사적이다. 결국 붙잡혀 회사 밖으로 쫓겨난 그녀는 다른 직업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알콜 중독자 엄마를 부양해야 하는 그녀는 소녀가장이다. 그녀는 밤마다 자기 전, 마치 자기에게 암시를 걸 듯 중얼 거린다. “내 이름은 로제타, 나는 평범한 삶을 살 거야, 나는 평범한 삶을 살 거야······.”


일자리 구하기, 친구 만들기, 엄마와 행복하기 등 누군가에게 가장 평범한 일상조차 그녀에겐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이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누군가의 가장 평범한 일상이 버킷리스트가 된 이들에 대해. 그렇지만 이들을 통해 지금의 내 삶에 감사한다거나, 이 정도면 다행인줄 안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남의 불행을 보며 ‘나는 이정도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남의 성공을 보며 내 인생은 시궁창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별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이들의 존재를 여전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인식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기연민과 비관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 인생만 모자라고 내 인생만 망했다는 착각 속에서. 그 거대한 착각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겸허하고 겸손한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또한 세상에는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영위해 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로 하여금 용기를 내 다음 발을 내딛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에 대해서.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옛날에 몸의 면역체계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얼굴에 여러 개의 수포가 났었다. 그래서 일 년 동안 화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선크림조차 바를 수가 없었는데, 그때 나의 버킷리스트는 예쁘게 화장을 하고 친구들과 나들이를 가는 것이었다. 지금의 내 버킷리스트는 살면서 베스트셀러인 책을 한 권쯤은 펴내는 것이다.


그때와 나의 차이점은 뭘까? 몸의 병이 다 나았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자유롭게 화장을 할 수 있다는 것? 아니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 점은, 바로 지금은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작고, 소박하고, 하찮고, 그렇지만 눈물겹게 간절한 버킷리스트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누군가의 가장 평범한 일상을, 가장 간절한 소망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도 한때 그 중의 한 명이었다는 것을.


나에게는 딱히 존경하는 사람도, 롤모델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언제나 존경한다. 여전히 이루고 싶은 꿈을 꾸고 있고, 소망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 이다지도 하찮고 작은 버킷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끝내 자기 자신을 져버리지 않은, 져버리지 않을 사람들. 나는 그들을 응원한다. 그들이 언젠가 그 버킷리스트들을 다 이루었으면 좋겠다. 그게 뭐든, 꼭 이루어졌으면. 꼭 이루어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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