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본책방

제1화 나의 호수

가쿠다 미쓰요(角田光代) / 번역 레이리

by 레이리

앞치마를 두른 채 걸으면 거리는 왠지 모르게 달라 보인다. 어딘가 모르게 낯설다. 연극 무대 속 풍경 같다. 여기 존재하나 사실은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자와 케이코는 그 거리감이 왠지 모르게 편하게 느껴진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상점가가 나온다. 역 앞에 슈퍼마켓이 생긴 것은 3년 전이지만 상점가는 여전히 활기 넘친다. 그 점이 거리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는 케이코는 한편으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6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

케이코는 남편이 주방장인 '이자와 레스토랑'의 지배인이다. 사실 지배인이라 해도 하는 일은 잡일뿐이다. 예약과 주문을 받고 요리를 서빙하거나 식탁보에 떨어진 빵가루를 치우는 일이다.

도심의 이탈리아 식당에서 일했던 남편 타케시가 독립해 자신의 가게를 낸 것은 5년 전이다. 당시 서른이었던 케이코는 근무했던 필기용품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 가게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던 케이코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편과 늘 함께 일하다 보니 이전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남편의 단점이 유난히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길길이 날뛰며 명령조로 변한다든지 저기압이면 남의 이목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건을 집어던진다든지 케이코도 피곤하기 마찬가지인데 입만 열면 피곤하다는 말밖에 하지 않는 남편.

오후 상점가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생선가게와 정육점 점원의 물건 파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장바구니를 든 여자들이 오가고 하굣길의 초등학생들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다. 채소가게가 가까워질수록 케이코는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있을까?"

케이코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간절한 마음은 더해만 갔다.
제발 그가 있기를 그가 있기를 그가 있기를...

채소가게가 가까워질수록 그 마음은 점점 간절해진다. 채소가게까지 그 몇십 미터를 앞두고 그녀는 어느새 10대 소녀가 되고 만다. 사랑의 부드럽고 달콤한 부분밖에 몰랐던, 그것이 사랑의 전부라고 믿었던 시절.

채소가게 밖에는 브로콜리와 토마토가 진열돼 있고 선명한 색상을 띤 진열대 앞에서 몇 명 여자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케이코는 까치발을 들고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있. 다.

그 순간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얼른 장바구니를 집어 들고 사야 할 목록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장바구니에 집어넣으면서 케이코는 흘끔흘끔 그의 모습을 훔쳐본다.

늘 채소를 팔던 '유기농 채소가게'에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온 것은 약 6개월 전이다. 가게 주인인 오오타케 씨가 그가 아직 대학생이라고 말해주었다. 뽀얀 피부를 가진 그는 쾌활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항상 웃는 얼굴로 묵묵히 일했다. 처음에 그에게 배달받았을 때는 뭔가 미덥지 않은 인상이었으나 점차 그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움이 되었다.

사람들이 그를 "텟짱"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케이코는 그의 본명을 몰랐다. 몰라도 크게 상관없었다. 그저 그의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텟짱은 가게 안쪽에 쭈그리고 앉아 유기농 쌀에 가격표를 붙이고 있다. 그때 문득 얼굴을 든 그가 케이코를 보자 씩 웃으며 "또 오셨네요"라고 말했다. "안녕하세요"라고 케이코는 연상녀답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두근거리는 맘이 들킬까 봐 내심 늘 떨린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케이코는 생각한다. 절대 사랑의 감정이 아니다. 그는 아직 대학생이다.
어떻게 해 보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혼자서 조용히 그의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렇게 계속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령, 하늘을 비춘 호수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듯이.

야채와 과일로 가득한 두 개의 장바구니를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배달 준비를 하면서 아직 값을 붙이고 있는 텟짱을 흘끔흘끔 곁눈질한다. 계산대의 오오타케 씨 부인이 "텟짱 이거 5시 전까지 배달 부탁해"라고 하자, 텟짱은 번쩍 고개를 들며 "네. 이자와 씨죠?"라고 상냥하게 대답한다.

잔돈을 받고 케이코는 야채가게를 나온다. 몇 발짝 걸어 나와 뒤를 돌아보니 텟짱이 케이코의 장바구니 안 물건들을 신문지로 포장하고 있다. 아이처럼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는 것을 느낀 케이코는 얼른 애써 굳은 표정을 지으며 걸어간다.

사실 이혼하려고 생각했던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자신이 원해서 남편 가게를 돕기로 했으면서 왠지 남편이 자신의 인생을 빼앗은 것 같았다. 특히 남편과 싸운 때는 그러한 박탈감이 더했다. 그러나 요즘 케이코의 생각은 달라졌다.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빼앗은 게 아니야. 나는 지금 완벽하지 않은 '타케시'라는 사람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내 인생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잘 안 되는 일도 있고 화 나는 일도 있고 모든 게 다 귀찮아질 때도 있겠지만 끝까지 보지도 않고 '다 틀렸어'라고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케이코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건 텟짱을 만나고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텟짱의 그 조용함, 케이코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그 깨끗함은 아직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은 사람이 가진 새하얀 미래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잘 안 되는 일은 없으며 화 날 일도 없으며 모든 게 다 귀찮아지는 일 같은 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깨끗함과 오만함. 그건 예전에 케이코도 갖고 있던 것이다.

'만약 지금 내가 스무 살이었다면 분명 그를 사랑했을 거야. 호수를 바라보는 듯한 마음을 쉽게 사랑이라고 믿었겠지'라고 생각하자 케이코는 35살인 자신의 나이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낀다. 사랑보다도 여유로운 마음은 얼마든지 있다. 사랑보다도 자신을 강하게 바꾸는 힘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음에 한숨이 놓인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시끌벅적한 상점가가 점차 멀어진다. 낮은 지붕들이 쭉 이어진 주택가를 곧장 지나면 남편의 가게 '이자와 레스토랑'이 나온다. 남편은 가게 의자를 붙여놓고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영업 시작 전까지 뭔가 언짢은 표정으로 이것저것 명령할 것이다. 케이코는 자신을 위해 '아자'라고 외치며 서둘러 걷는다. 살짝 올려다본 하늘이 투명하리만치 온통 파랗다.


전 편의 등장인물이 주인공이 되어 두 번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2006년 정열대륙 +p에 연재됐던 가쿠다 미쓰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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