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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예리 Sep 09. 2022

[뉴욕기] 5.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면 일어나는 일

하루에 26000보를 걸었다

월스트리트에 다녀오고 나서 뭘 해야 할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우선 보조 배터리를 챙기지 않았기에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멕시코에선 종이 지도를 들고 다니면서도 잘 다녔는데 뉴욕에선 인터넷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바뀐 건지 상황이 바뀐 건지. 여행 내내 스마트폰과 보조 배터리는 분신처럼 함께 했다.


가까운 첼시마켓으로 향했다. 첼시마켓에는 먹거리가 많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식욕이 없는 (?)이다. 맛있는   찾아 먹어야 겠다는 의지가 강하지 않다. 배고프면 먹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혼자 여행 다닐  거의 하루에 한끼를 먹었다. 근사한   정도면 충분했다.


첼시마켓 근처에는 구글 건물이 있었다. 역시나 사전 조사를 하지 않았기에 그마저도 신기했다. 건물 앞에서 셀카를 찍고 첼시마켓으로 들어갔다. 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다들 마스크를 벗고 있었다. 아직 실내에서 마스크를 벗는 게 익숙치 않았던 나는 조금 망설이다 마스크를 벗었다. 산뜻한 옷들로 가득한 옷 가게에 제일 처음 들어갔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있었지만 한국에선 입기 어려울 것 같았다.

첼시마켓에 있는 옷 가게에서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옷을 보다 점원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활짝 웃는 얼굴로 나가는 고객에게 “Have a nice day!”를 외쳤다. 그러면 고객들도 나가다 말고 환한 미소로 “You, too!”라고 답했다. 이날 배운 건 여행 내내 써먹었다. 한국에 와서도 내릴 때 택시 기사님한테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인사하는 게 습관이 됐다. 낯선 사람이 주는 작은 호의에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알게 됐다. 큰 힘 안 들이고도 행복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다.


슬슬 배가 고파졌기에 먹을 만한 음식을 물색했다. 그러다 ‘사라베스’란 간판이 눈에 띄었다. 친구가 뉴욕에 가면 꼭 가보라고 추천했던 기억이 났다. 드라마 섹스인더시티에 나오는 유명한 브런치 가게라고 했다. 고민없이 들어가 에그 베네딕트와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음식을 받고 자리에 앉아 검색해 보니 판교 현대백화점에도 지점이 있었다. 하하.


에그 베네딕트는 조금 짰고 느끼했다. 브이로그도  찍다 사람들도 관찰하다 그러면서 음식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동양인 여성은 내게 의자를 가져가도 되냐고 영어로 물었다. 나도 영어로 대답했고 그녀는 의자를 가져가 맞은 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한국어로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캐나다에 아주 잠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어렸을 때였는데, 길가다 한국인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웠다. 동생과 함께 먼저 가서 말을 걸고 아는 척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인이어도 그런가보다 하고 스쳐가게 됐다. 오히려 괜히 일탈을 하고 싶어 한국인이 아닌   때도 있다. 실제 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첼시마켓을 나와 소호로 가기로 했다. 이 판단은 거의 1분도 안 돼 이뤄졌다. 좀 느긋하게 있어도 될 법 했는데 가만히 있기 아까웠다. 소호까지는 걸어 가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닌다. 신발도 구두보단 운동화 신는 걸 선호한다. 이날 날씨도 맑았다. 골목골목 들여다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날이 좋아서, 뉴욕 한복판이라서 기분이 좋은 걸까. 아니면 평일 낮에 별 생각 없이 발길 닿는대로 걸어서 좋은 걸까. 길가다 보이는 노란색 스쿨버스마저 예뻐 보였다.


그러다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길가에는 나와 그 밖에 없었다. 앞서 가던 그는 헤드폰을 낀 채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만의 세계에 있는 듯 팔과 다리를 길게 뻗었다가 멋지게 한 바퀴 돌았다. 리듬을 타며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자유를 눈으로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모습에 해방감이 느껴졌다. 내 리듬대로 한 발 한 발 쿵짝짝 쿵짝짝.

날이 참 좋았던 뉴욕의 6월 17일.

소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쳤다. 사람이 많았고, 더웠다. 기억에 남는 건 룰루레몬의 마네킹 체형이 다양했다는 점이다. 나이키에 갔을 때도 그랬다. 미국은 다양성을 중시한다는 걸 확인했다. 소호 스타벅스에선 ‘테리’라고 불렸다. 예리란 이름은 외국인이 알아듣기에 쉽지 않나 보다. 쇼핑 계획이 없는데 소호에 가니 당황스러웠다. 상점마다 들어가 보긴 했지만 여기서는 ‘J’의 특성이 발휘됐다. 계획에 없는 쇼핑을 하기 힘들었다.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지만 계획이 없으니 어딜 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다시 첼시마켓으로 가기로 했다. 회사 선배가 추천해주신 첼시마켓 근처 브런치 식당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약을 해보려니 이미 꽉 찼다 해서 현장에서 갈 수 있을지 알아보기로 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여행을 하니 동선이 꼬였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식당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결국 닭가슴살 샐러드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뉴욕에는 괜찮은 샐러드 가게가 많았다.


이날 총 2만 6,000걸음을 넘게 걸었다. 평소에는 항상 효율적 동선을 고려한다. 전날 밤 약속 장소까지 가는 법을 미리 검색해보고 근처 커피샵도 알아봐 둔다. 일상에선 촘촘히 계획하는 편인데 여행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비효율적 동선이 나왔다. 그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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