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다
뉴욕 취재 일정 둘째 날. 산뜻한 아침이었다. 날이 좋아서 옷차림도 가볍게 밖으로 나갔다. PD님이 챙겨준 삼각대도 가방에 욱여 넣었다. 삼각대까지 챙겨야 할 줄 알았더라면 좀더 큰 가방을 가져올 걸 싶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날은 저녁에 클레이시티와 클레이다이스, 클레이튼,한화가 공동 주최하는 칵테일 파티에 갈 예정이었다. 장소를 찾아 보니 숙소 바로 근처인데다가 고층이었다. 40층과 41층이니 뉴욕의 야경을 마음껏 볼 수 있겠다 싶어 설렜다.
조금 일찍 나서서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NFT 기업들이 시간 맞춰 광고를 한다 해서 사진을 찍으러 갔다. 타임스퀘어 전광판이 NFT로 물드는 광경을 보니 감개무량했다. 삼성도 NFT.NYC 행사 기간에 맞춰 사이드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 행사 광고도 계속해서 나왔다. 웹3.0 패권을 잡으려는 기업들의 각축전을 전광판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NFT.NYC2022 행사는 5개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일정표를 보면서 미리 듣고 싶은 연사의 일정을 체크해둬야 했다. 누구든 연사로 나설 수 있었기 때문에 기사에 쓸 만한 강연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이날 내가 택한 장소는 꽤 컸는데, 특히 화장실이 예뻤다. 행사장에서 베이글과 따뜻한 커피를 제공해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이후 데빈 핀저 오픈씨 공동창업자를 비롯해 이반 소토 라이트 문페이 대표, 라이언 와트 폴리곤 스튜디오 대표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메인 행사가 열리는 매리어트 마르퀴스 호텔로 향했다. 사람이 정말 많았는데 이곳에서도 점심 식사를 제공했다. 점심으로 나온 샐러드와 푸딩, 과일 등을 챙겼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먹었는데 이 와중에도 기록을 하겠다고 열심히 카메라를 켰다. 영상에도 나오는데, 이때 나는 마음이 바빴다. 빨리 밥 먹고 하나라도 더 둘러보고 싶단 욕심이 컸다.
서둘러 밥을 먹고 나는 코인베이스 NFT, 트론 등 해외 프로젝트서부터 행사장을 찾은 국내 기업까지 취재했다. 브이로그를 찍는다고 양해를 구하고 멘트도 땄다. 공간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닥이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사람 많은 데를 싫어하는 내겐 고역이었지만 버텼다. 시끄러웠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다양한 기업의 멘트를 따서 뿌듯했다. 장소를 옮겨 다른 곳으로 가볼 작정이었다. 그러고 호텔 로비로 향하는 데 문득 가방을 봤다. 가방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여권이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멘붕이 왔다. 가방은 두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앞 뒤 공간을 다 뒤져도 여권은 찾을 수 없었다. 행사가 이뤄지는 층 별로 다 돌아 다녔는데, 도무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방 문이 열려 있는 걸 보니 누군가 훔쳐갔다는 의심도 들었다. 급한 마음에 호텔 직원을 붙잡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친절한 직원들은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지만 규정 상 다른 층에는 갈 수 없다고 했다. 호텔 로비로 내려가 1층 직원에게 여권을 잃어버렸다고 얘기하고 도움을 구하라 했다. 1층으로 가서 이야기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는 지금 당장은 여권을 주웠다는 사람이 없다며, 내게 호텔 번호를 알려줬다. 시도 때도 없이 호텔에 전화해서 누군가 여권을 주웠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숙소에 여권을 두고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가 캐리어를 뒤졌다. 어디에도 없었다. 손이 떨렸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사실 찔끔 울었다). 우선 인터넷에 여권 잃어버린 후기를 찾아봤다. 영사관에 전화를 하는 동시에 뉴욕 특파원 선배에게도 말씀을 드렸다. 너무 내가 바보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자책할 일은 아닌데, 그날은 정말 자책을 많이 했다.
영사관에 전화를 수차례 했다. 다행히 영사관과 통화가 닿았지만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여권을 발급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울먹이며 사정을 했고, 목요일 아침 9시까지 영사관으로 가면 임시로 여권을 발급해준다고 했다(이날은 화요일이었다). 다행히 숙소에서 영사관까지 거리는 멀지 않았다. 걸어서 약 30분정도였다.
상황이 종료되고 나니 긴장이 탁 풀렸다. 그간의 경험상 이런 날은 집에 있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코앞에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가지 않기로 했다. 저녁꺼리를 사와야 했는데 나가기가 두려웠다. 이때만 해도 나는 누가 내 가방 문을 열고 여권을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꾸역 꾸역 미루다 대충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호텔 로비에 있는 바를 발견했다. 굳이 밖으로도 나가지 않아도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안주로 피자를 시켰다. 맥주 한 병을 비우고 칵테일도 몇 잔 마셨다.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다. 실시간으로 감정을 나누고 싶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이때 기억은 두고두고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어쩌면 이날을 계기로 나는 결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나를 다독거렸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괜찮아졌다고.
그러고 거나하게(?) 취해 숙소로 돌아왔다. 습관처럼 메일함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누군가 내 여권을 주웠고, 행사 관계자에게 맡겼다. 누가 일부러 훔쳐간 게 아니라 내가 흘린 것이었고, 감사하게도 누군가 그걸 주워 행사 관계자에게 맡기는 수고까지 해줬다. 행사 관계자는 내 메일 주소를 찾아 직접 메일까지 보내줬다. 감사하고 행복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밖에 나가기조차 무섭다가 마음이 금세 바뀌었다.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다.
이렇게 뉴욕에서 여권을 잃어버린 사건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그렇지만 이 사건이 내게 남긴 자욱은 꽤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