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잠시 개었던 비가 밤이 되니 다시 내리고 있습니다. 겨울을 재촉하는 처량한 가을비입니다. 어제의 화창했던 가을 날씨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계절이 또 그렇게 가고 옵니다.
오늘부터는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의상조사의 법성게 강의를 정화 스님이 풀어쓴 책입니다. 의상 스님은 원효 스님과 더불어 우리나라 사상계의 큰 봉우리를 이루는 분으로 신라 화엄종의 開祖라고 합니다.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낙산사 관음굴에서 수행하였으며, 나중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3000명의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영정이 부석사에 모셔져 있다 합니다.
이 책은 의상 스님이 80권이나 되는 방대한 <화엄경>의 사상을 210자의 시로 축약해 놓은 것을 정화 스님이 알기 쉽게 풀어서 해설한 책입니다. 풀어서 썼다고는 하나 불교용어와 불법의 사상을 담은 글이라 이해하기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도 전에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읽으며 조금씩 공부해둔 지식들이 도움이 됩니다.
“나 그대로 전체이며 너 그대로 전체인 데서 나와 너가 하나 된 장이 무아의 緣起” / 연기의 하나 된 삶이 법성입니다. 나와 너가 전체를 이루는 부분이 아니고, 나와 너 그대로 전체로서 하나의 장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는 너의 기운을 받아 나가 되고, 너는 나의 기운을 받아 너가 되어 서로를 온전하게 살게 하는 생명의 장이 곧 緣起의 相卽相入입니다.” / 나는 당신의 기운을 받아야 비로소 나로 존재하게 됩니다. 당신도 나의 기운을 받아들여 온전한 나가 되십시오. 우리는 서로를 온전하게 살게 하는 생명의 장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무상이란 한 순간도 일정한 모습으로 계속되지 않는, 더는 나눌 수 없는 시간, 길이를 갖지 않는 시간, 시간이라고 하지만 시간밖에 있는 시간의 변화입니다.”
‘길이를 갖지 않는 시간’, ‘시간 밖의 시간’ 그것이 무상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생과 멸이 동시에 함께 하는 총체적인 흐름입니다. 무상, 무아, 열반 그것은 본디 우리 삶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대상이 한 삶임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나 대상의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순간, 분별이 일어나면서 마음과 대상이 타자화 되고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생생한 삶은 명사화되지 않는 변화들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없습니다. 다만 변화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우주 법계의 춤이라고 합니다.”
전에 제가 위의 글을 인용해서 편지를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춤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이 춤은 멈춤도 동작도 없는 춤입니다. 춤이라고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춤의 형상을 벗어난 무엇입니다. 우리는 그것의 실체를 알 수 없고 다만 경험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싶어 합니다. 무엇인가 이름 짓고 상태를 규정하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왜곡과 모순, 번민을 낳을 뿐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상당히 정신을 각성시킨 상태에서 머리를 굴려가며 책을 읽었습니다. 마음의 원리와 우주의 법칙, 삶의 실체를 밝혀놓은 책들이 저는 참 재미있습니다. 오늘 하루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비가 참 좋습니다.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안식을 취하려 합니다. 그럼.
2006 11.6 산비
오늘 하루는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여러 가지 잡생각들로 번잡스러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저의 진정성에 대해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되짚어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떳떳하고 진실한지 나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거짓됩니다. 엉터리입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져들 뿐입니다.
마음을 다잡고 책을 다시 들었습니다. 정화 스님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진리의 길을 밝혀줍니다. 글이 간결하며, 핵심 사항을 적확한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어 읽으면서 쌈박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법어와 불교의 사상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들려줍니다.
멋진 구절들이 저를 책에 빠져들게 합니다. 잘 해득이 안 되는 구절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또한 ‘삼매’에 이르는 하나의 수행이 되는 듯도 싶습니다.
“사는 동안 뭔가 해보려고 하면 서둘러야 한다. 해 지기 전에, 첫눈 내리기 전에. 삶이 길다지만 언제나 짧은 것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비스와바 심보르스키’의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순간순간 잊고 삽니다.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늙어지고, 곧 삶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바로 내일, 우리는 우리의 잡은 손을 놓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할 일을 해 지기 전에,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해냅시다. 좋은 밤 되십시오.
2006 11.7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