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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Jan 03. 2019

돌로미테 알타비아 1

트레킹 1일 차 (7월  28일)

    

=> 계획 (25km/9hr) : 8시 출발, 콜밴 탑승 - 아우론조 산장(40분/80유로) - 트레치메 라운드 트레킹(10km/4hr)- 로카텔리 산장 - 아우론조 산장 점심 - 1pm 콜밴 탑승 - 브라이에스 호수(Lago di Braies) 들머리(1시간/145유로) - 2pm 트레킹 시작 - 비엘라(Biella) 산장 - 세네스(Sennes) 산장 - 페데루(Rif Pederu) 산장(15km/5hr) 7pm 도착 - 택시로 숙소(Hotel Riposo al Bosco) 이동 

=> 실제 : 25km / 11시간 30분, 페데루 산장 저녁 8시 30분 도착    


여행은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미리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해도 중간에 엉뚱한 일이 터지면 그만 일이 엉클어지고 만다. 세웠던 계획은 수정해야 하고 벌어진 일은 어떡하든 수습을 해야 한다. 일이 틀어졌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냥 상황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 안에서 해결책을 찾으면 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시내 산책에 나섰다. 여행지에서 늘 하는 우리의 일과다. 6시를 기상 시간으로 정해두었지만 조기 건강교실 회원들답게 5시가 넘으니 더 이상 누워있지 못한다. 새벽 공기는 상큼하고 아침 햇살은 눈부시다. What a wonderful day! 이렇게도 화창한 아침이라니. 비가 내릴 거라던 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은 결국 기우에 그치고 말았다.    

오랫동안 서울의 미세먼지에 시달린 탓인지 서늘한 아침 산 공기가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서울은 지금 폭염과 열대야로 찜통이라던데 이곳 돌로미테의 아침 기온은 섭씨 15도. 안성맞춤의 피서다. 한가롭게 시내를 거닐며 거리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공원을 지나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산책을 이어간다. 계곡 물소리가 우렁차고 시원하다. 뇌를 맑게 하는 청명한 소리다.     


-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 -    


호텔 조식을 맛있게 먹고 짐을 꾸려 오늘의 트레킹에 나섰다. 예약한 밴 택시가 정각에 도착해서 대기 중이다. 우리를 안전하게 모실 기사는 ‘안드레아’. 내가 ‘안드레아 보첼리’를 좋아한다고 하니 씽긋 웃는다. 자기는 노래는 잘 못 한다고. 한 시간이 채 안 걸려 ‘트레 치메’ 트레킹의 들머리 아우론조 산장(Rifugio Auronzo, 2233m)에 도착했다. 성수기라 시내에서 조금 늦게 출발하면 많이 막힐 수도 있는 길인데 다행히 순조롭게 도착했다.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e Lavaredo)’ 라운드 트레킹에 나섰다. 풀이하자면 '라바레도의 세 봉우리'란 뜻이다. 거대한 암봉 세 개가 우뚝 서서 천하 일경의 멋진 경치를 자랑한다. 이곳은 돌로미테의 대표적 관광지이지만 알타비아 코스와는 사실 조금 떨어져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정상 포기할까도 생각했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로미테의 상징 ‘트레 치메’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보통은 하루를 할애해야 하지만 시간 사정이 여의치 않은 우리로서는 반나절 만에 10km를 완주하고 오후에는 ‘알타비아 1’ 들머리로 서둘러 이동을 해야만 했다.    

배낭은 밴 택시에 남겨두고 물병만 챙겨서 길을 나선다. 아우론조 산장에 미리 점심 샌드위치를 예약해놓고 101번 길로 들어섰다. 길이 정말 좋다. 그래서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가보다. 라바레도 산장까지는 걷기 좋은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산장 주변으로는 기묘한 침봉들이 장관이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옮겨놓은 듯 뾰족뾰족한 바위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이어서 장엄하게 펼쳐지는 거대한 바위 봉우리, ‘트레 치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겨우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의 위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날씨마저 환상적이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 길 가에 피어난 알프스의 아름다운 꽃들. 원더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함께 온 윤 원장이 연신 찬사를 내뱉는다. 굿. 굿. “이걸 본 것만으로도 여기까지 멀리 날아온 보람이 있네. 이미 본전 다 뽑은 것 같다. 하하”        


- 로카텔리 산장 -   

 

라바레도 산장(Rifugio Lavaredo,2320m) 앞에서 언덕길을 올라 라바레도 고개에 올라섰다. 일반 관광객은 여기까지만 와 보고 그냥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우리는 트레 치메를 한 바퀴 도는 라운드 트레킹을 할 계획이라 곧장 로카텔리 산장(Rifugio Locatelli, 2450m)으로 향했다. 언덕 위에 우뚝 선 모습이 아주 멋진 산장이다. 이곳에서 해 질 녘과 해 뜰 무렵 바라보는 트레 치메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파노라마가 아주 장관이라고 한다. 세계 1차 대전 때는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곳으로 당시 건물이 모두 파괴되었다가 193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고.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갈증을 씻어내는 맥주 한 모금은 여행자의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생명수다. 노말 루트를 버리고 산 중턱 길을 선택했던 A팀도 뒤늦게 합류했다. 우리의 A팀, B팀 나누기 놀이는 이후에도 계속되며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양산하게 된다.   

  

이제 105번 길을 걷는다. 트레 치메의 뒤태를 구경하며 걷는 길이다. 뒤에서 봐도 트레 치메는 역시나 감동이다. 길은 101번 길에 비해 다소 고저차가 있다. 오르막에서는 꽤나 힘을 써야 했다. 중간에 랑알 산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체력이 좋은 선발 조를 먼저 보내 주문해놓은 샌드위치를 수령하게 했다. 첫날은 모든 것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남들은 이틀에 걸쳐 진행하는 일정을 우리는 하루에 소화해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찍 도착한 선발 조원들은 아우론조 산장에서 점심을 먹었고 늦게 도착한 후발 조는 결국 밴 택시에 올라 이동하며 점심을 때웠다.    


- 쾌조의 스타트 -    


돌로미테 알타비아 1 코스의 들머리는 ‘브라이에스 호수(Lago di Braies)’이다. 브라이에스 호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캐나다 벤프의 ‘레이크 루이스’를 빼닮았다. 호숫가엔 호텔과 상점들이 늘어서서 맛있는 냄새로 관광객을 유인한다. 출발 전 호수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드디어 6박 7일 대장정의 발을 내디뎠다.

    

오후 1시 30분. 예정보다 30분 이른 쾌조의 스타트다. 호수를 왼쪽으로 돌아 호수 반대편에 있는 등산로 입구를 향해 걸었다. 오른쪽으로 돌아도 마찬가지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멋진 호수의 경치를 감상하며 산책로를 따라 30분쯤 걸어서 알타비아 표시가 있는 트레일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힘든 오르막이 시작된다. 얕잡아 봤다가 아주 호되게 당한 구간이다.     

아예 마음의 준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1500m의 고도를 올려쳐야 하는 된비알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남들은 하루 일정으로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가이드북에는 오늘의 목적지 페데루 산장까지 5시간 소요라고 적어 놨다. 작은 글씨로 휴식시간 빼고 오직 걷는 시간만이니 추가 시간을 계산하라는 친절한 안내문구가 있기는 했다. 우리를 들머리까지 태워다 준 기사 안드레아는 우리가 오늘 페데루 산장까지 걸을 거라고 하자 눈이 둥그레지며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그 모든 사안을 고려하여 서두른 끝에 계획보다 출발 시간을 30분 단축했던 것이다.    


-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 -    


O! Sole Mio. 엄청난 자외선을 뿜어내는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이 문제였다. 고도를 높여갈수록 나무의 키가 낮아졌다. 수목한계선을 지나자 남은 건 거친 바위뿐이었다. 땡볕 아래 그늘 한 점 없는 길이 이어졌다. 지코펠 산(Seekofel, 2810m)을 향해 오르는 오르막은 황영조가 숨을 헉헉거리며 오르던 몬주익 언덕 저리 가라였다. 심장에 최신 시한폭탄 스텐트를 장착한 나로서는 첫날부터 너무나 무리한 일정이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진두지휘한 일이니 누구를 탓하랴! 절친인 윤 원장이 계속해서 나를 돌보고 챙긴다. “괜찮니?” “물 좀 마실래?” “배낭을 내가 좀 들어줄까?”    

산에서 나의 배낭을 누군가에 맡기고 의지한다는 것은 내 철학과 자존심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상상황이다. 만약 내 심장이 무슨 문제를 일으킨다면 이번 트레킹은 모두 도루묵이 되고 말 것이었다. 나는 자존심을 접고 내 배낭을 윤 원장에게 의탁했다. 일단 이 오르막 구간만 힘을 좀 빌리자. 그 후로도 두세 번을 더 나는 윤 원장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트레킹을 이끌고 있는 대장으로서는 창피한 일이었지만 대원들은 그런 나의 상황을 모두 이해해줬고 윤 원장과의 우정을 부러워했다.  

                        

중간에 잠시 내 배낭을 대신 멨던 재일 씨는 오버 페이스로 본인이 다리에 쥐가 나는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 힘이 좋은 주택 씨만 선두로 나서 비엘라 산장(Rif. Bielia,2300m)에 먼저 도착했고 나머지 대원들은 더위와 갈증과 씨름하느라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타난 ‘산장까지 남은 거리 5분’이라는 표지판이 어찌나 반갑던지. 소라 포노 고개(Forcella Sora Forno,2388m)에 올라서자 고개 너머로 비엘라 산장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산 정상으로 향하는 갈림길을 뒤로하고 산장으로 한달음에 내려갔다. 주택 씨가 건네는 콜라 한 잔이 가히 꿀맛이다.     


- 당신이 신이라면 -    


시간이 계속 뒤로 밀려나고 있다. 원래 비엘라 산장 도착 계획 시간은 오후 5시였다. 그러나 시계는 이미 6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페데루 산장 픽업 시간 7시를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모두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재일 씨는 계속 쥐가 올라오는지 누워서 다리를 거머쥐고 고통스러워했다. 근육 이완제를 먹게 하고 열심히 다리를 주물러보지만 역부족이다. 저체온증까지 오는지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떤다. 최악의 상황이다. 일단 택시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픽업 시간을 늦추었다. “조금 늦을 것 같아요. 8시까지 갈게요” 기사가 빈정거린다. “당신이 신이라면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8시까지도 힘들 거라는 말이다. 호텔에도 전화를 걸어 체크인이 늦어질 것 같다고 전한다. 체크인은 문제가 아닌데 식당 저녁 주문이 8시면 마감이란다. 허걱.   

  

원안은 페데루 산장에서 첫 박을 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모든 것이 더 순조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산장 예약 후 어떤 착오로 디파짓(deposit 보증금)이 입금이 되지 않아 예약이 취소되어버렸다. 그 사실을 여행 출발 3주 전에야 알아차렸다. 부랴부랴 대신 구한 숙소가 산 비길리오(San Vigilio) 마을의 리포조 알 보스코 호텔(Hotel Riposo Al Bosco)이었다. 성수기라서 산장들의 예약이 모두 끝난 상태라 정말 어렵게 구한 숙소였다. 페데루 산장에서는 택시를 타고 15분 정도 더 가야 하는 곳이다.     

어쨌거나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첫날부터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다리를 절뚝거리며 길을 걷는다. 다행히 비엘라 산장을 지나고는 큰 오르막 없이 완만하고 평탄한 길이 이어졌다. 얼마 안 가 나타난 세네스 산장(Rifugio Sennes, 2116m)은 그냥 통과한다. 소들이 노니는 초지를 가로질러 임도처럼 길게 이어진 길을 속도를 내어 바쁘게 걸었다. 호텔에서 최종적으로 저녁 오더를 받을 수 있다고 한 8시 30분에 시간을 맞추려면 페데루 산장에는 최소 8시 15분까지 도착해야 했다. 마지막 급경사 내리막길을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 모를 정도로 뛰다시피 질주하여 기적적으로 시간을 맞추었다.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택시 기사는 이건 ‘크레이지 플랜’이라며 놀라는 건지, 놀리는 건지 헛웃음을 짓는다.   

  


서둘러 택시에 몸을 싣고 내달려 알 보스코 호텔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체크인도 미루고 배낭을 모두 밖에 그냥 던져놓고 식당 테이블에 착석. 하마터면 저녁을 먹지 못할 뻔했다. 미리 전액을 지불한 숙소 요금에는 숙박과 저녁, 아침 조식까지 포함되어 있으므로 저녁 식사를 놓치면 손해가 크다. 요금을 떠나서 그날 저녁 만찬은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완전 대반전. 산 비길리오 최고의 맛 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요리였다. 하긴 그 상황에 무엇인들 맛이 없을 수 없었겠지만.    

 

샐러드와 빵은 뷔페처럼 차려진 테이블에서 마음껏 가져다 먹을 수 있다. 전채 요리로 나온 수프는 무슨 재료로 만든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정말이지 영혼을 위로하는 맛있는 수프였다. 한 입 떠먹는 순간 가슴이 따듯해지며 미소가 지어졌다. 메인 디쉬로는 크림 파스타와 닭 가슴살 스테이크 두 가지가 나왔다. 모두 훌륭한 맛이었다. 디저트로 나온 블루베리 케이크와 민트 셔벗은 완전 예술이었다. 입안이 개운하게 정리가 되었다. 다들 대장이 실수한 것 중 제일 잘한 실수가 숙소를 산장에서 호텔로 바꾼 것이라고 즐거워했다. 이런 걸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라고 하나 보다.     


스펙터클 했던 첫날을 뒤로하고 우리는 씻기가 바쁘게 잠자리에 들었다. 21세기 들어 가장 긴 개기월식이 있는 날이라는데 달은 아랑곳없이 교교하기만 하다.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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