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 3일 차 (7월 30일)
=> 계획 (14km/5hr) : 10시 출발 - Rif Dibona(점심) - Rif Cinque Torri - 스코이아톨리 산장(Rif. Scoiattoli) 4pm 도착 - 자유시간 (친퀘 토리 산책, 전쟁유적지 탐방)
=> 실제 : 숙소 저녁 7시 도착, 9시간 30분 소요
산길을 오래 걷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때로는 완전히 지쳐서 탈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힘든 것이 슬픈 일은 아니다. ‘의지의 견고함’ 어쨌거나 계속 해나가려고 하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날씨가 안 좋다고, 누가 뭐랬다고, 실수를 했다고 좌절하고 포기하지 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여행을 해나가는 것. 전진하는 것. 그런 투지가 필요하다. 넘어져도 울지 않고 다시 일어나 힘을 내서 걷기. 그것이 걷기 여행자의 숙명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산장 뒤편에 고난의 예수가 매달린 나무 십자가 언덕이 있다. 세계 1차 대전 당시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최대의 격전지였다. 오스트리아군은 이곳 라가주오이 언덕에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정작 전투보다도 추위와의 싸움이 더 문제였다고 한다. 1916년 12월13일, 영하 40도에 8m까지 눈이 쌓였던 날. 눈사태로 만 명의 병사가 그만 목숨을 잃고 만다. 당시 숨진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언덕 정상에 나무 십자가를 세웠다고 한다. 포성은 사라지고 이제 이곳은 유명 관광지가 되어 하릴없이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아침 기온이 제법 쌀쌀하다. 우모복에 버프까지 두르고 해를 기다렸지만 아쉽게도 일출은 볼 수 없었다. 암봉 뒤편에서 붉게 퍼져 나오는 빛의 번짐을 조망할 수 있었을 뿐. 오늘은 ‘레스트 데이’ 무척 여유로운 날이다. 전체 트레킹 일정 중 가장 짧은 거리를 걷는 날로 계획을 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여지없이 틀어지고 만다.
조식을 마치고 충분히 쉬면서 자유시간을 가지도록 했다. 일정대로라면 10시에 출발해도 오후 4시면 숙소 산장에 도착할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쉬라고 해도 가만히 쉬지를 못하는 사람들. 조금 미적미적 하다가 다들 가만있지 못하고 채비를 서두른다. 몸을 가볍게 풀고 9시 반에 산장을 출발했다. 계획보다 30분 이른 출발이다. 오전에는 내리막길이라 부담이 없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700m 정도 다시 고도를 올려야 한다.
계곡을 가로지른 능선 저편으로 우리가 오늘 묵을 스코이아톨리 산장과 다섯 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친퀘 토리(Cinque Torri)가 보였다. 곤돌라를 따라 곧장 내려갔다가 다시 급하게 올려치는 지름길도 있었지만 우리는 좀 더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가다가 디보나 산장을 경유하는 코스를 걷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 여유롭고 느긋한 분위기였다.
능선을 내려서면서부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부대장 겸 총무를 맡고 있는 주택 씨에게 “절대 알바를 해서는 안 된다.” “길 번호를 잘 확인해야 한다.” 주지를 시켰다. 서로 더블 체크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도 못 미더워 갈림길에서는 자주 다른 트레커 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길을 물으면 그들은 꼭 휴대한 지도를 꺼내들고 정확한 방향을 확인해주었다. ‘우리도 지도를 사올 걸 그랬나?’ 에고.
가이드북에 약도가 있기는 했지만 실 축적지도의 정확도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디보나 산장이 어느 쪽이죠?” 당일 관광을 온 이탈리아인 노부부가 지도를 펴들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그라찌에(Grazie:감사합니다)”
지름길처럼 보이는 하산 길을 마다하고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간다. 날씨는 화창하고 꽃들은 만발이다. 멀리 아스라한 산들과 가까이 웅장한 암봉들.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콜 데 보스 고개(Forcella Col dei Bos, 2331m)를 지나 출발 세 시간 만에 디보나 산장(Rif. Dibona, 2083m)에 도착했다. 우선 시원한 맥주부터 한 잔 주문했다. 재일 씨가 가져온 마른 멸치와 고추장이 완전 히트다. 며칠 김치 없이 양식만 계속 먹었더니 이제 슬슬 김치와 고추장이 그리워지고 있다. 이어 나온 스테이크와 파스타도 완전 대박이었다. 고소한 등심이 어찌나 맛있던지. 그릴에 구운 가지와 오이, 토마토도 맛이 아주 좋았다.
우리끼리 맛있게 점심을 먹고 있는데 이탈리아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와서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묻는다. 알고 보니 그는 왕년에 마도로스 출신으로 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30년 전에 한국 부산에도 와 본적이 있다고. 아마 그래서 더 우리에게 흥미를 느끼셨나보다. 반가운 정을 서로 나누었다.
디보나 산장을 떠나 이제 친퀘 토리로 향한다. 내리막길을 좀 더 내려가서 도로 하나를 건너면 이후부터는 친퀘 토리까지 계속 오르막길이다. 여기서 헤맨 사람들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터라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구간에서 이번 트레킹 최장의 알바를 하고 만다. 올 것은 오고야 마는 것인지.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들어맞는지. 분명 지도를 확인하고 442번 길로 내려서서 439번 길로 들어서면 된다는 것을 확인했었는데... 우리는 그만 403번 이정표에 홀려 403번 표지판만 계속 따라가고 만다. 왜 그랬을까? 마가 씌운 것일까?
고도를 낮추자 전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늘진 숲길, 푹신한 흙길이 너무나 걷기 좋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룰루랄라. 우리 앞에 다가올 시련에 대해서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어째 내리막이 좀 길게 이어진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뜬금없이 스키 슬로프가 나오고 리프트가 나와도 그러려니 했다. 아스팔트 도로에 내려선 후에야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여기가 아닌 가봐” 에고.
원 목표 지점보다 너무 아래쪽으로 치우쳐 내려온 것이었다. 맥이 탁 빠진다. 하지만 어찌하랴? 터벅터벅 패잔병이 되어 차가 씽씽 다니는 도로를 걸었다. 힘들고 지치고 짜증이 났다. 자꾸만 자책이 된다. ‘좀 더 주의를 기울일 걸’ 한 시간여를 더 걸어서 처음 목표했던 지점에 도착했다. 대략 6km를 우회한 셈이다. 무슨 “레스트 데이?” 그놈의 입방정이라니.
이 세상에 100%는 없다. 절대라든지, 완전이라든지, 무조건은 없다. 그러므로 너무 단정적으로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금은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누군가는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길 위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 확신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면 반드시 길을 잃게 된다.
이후 친퀘 토리까지의 오름 질은 처절한 사투였다. 중간엔 때 아닌 우박이 쏟아지고 비가 내렸다. 서울은 폭염이라던데 여기는 얼음이 하늘에서 쏟아진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는 오히려 반가웠다. 돌로미테 트레킹 중에 처음 만나는 ‘첫비’다. 온 몸이 비와 땀에 젖은 채 친퀘 토리 산장(Rif. Cinque Torri, 2137m)에 들어섰다. 산장에는 한국의 여행사에서 온 단체 패키지 팀이 여유롭게 쉬고 있었다. 그들은 버스로 이동하고 곤돌라를 타고 오른 후 짧은 구간을 걷는다. 오늘은 왠지 그들이 부러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우리가 묵을 스코이아톨리 산장은 여기서 30분 정도 언덕을 더 올라가야한다.
다행히 비는 멎었다. 여장을 정비한 후 남은 힘을 모아 친퀘 토리 언덕을 넘는다. 마지막 기를 쓰며 힘을 쏟은 끝에 언덕 위에 올라서는 순간,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스코이아톨리 산장(Rif. Scoiattoli, 2225m). 아! 감격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오늘 하루도 만만치 않았다.
저녁을 먹고 2층 테라스에 모두 모였다. 계획했던 전쟁유적지 탐방과 친퀘 토리 산책은 내일 아침으로 미루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대책 회의를 가졌다. 일정표에 문제가 있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가이드북의 소요시간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다리가 긴 서양인들의 걷는 속도를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일은 18km, 그 다음 날은 24km를 걸어야 하는데 과연 계획대로 8시간, 9시간에 해낼 수 있을까?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래도 가야지 어쩌겠는가? 정신 바짝 차리고 알바만은 하지 말자는 굳은 다짐을 하며 회의를 마쳤다.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 산장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북두칠성이 옆으로 기울었다. 오리온자리도 보이고... 아쉽게도 달빛이 환해 은하수를 볼 정도는 아니다. 돌로미테의 밤이 깊어간다. 잠은 오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