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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비 Feb 12. 2019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를 펴 들었습니다.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좀 엉성합니다. 강연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도 하고,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것도 같고. 아니나다를까 두 권의 책을 번역하여 저자 동의하에 재구성했다고 역자가 뒤에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담긴 내용만은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진귀하고 신선한 글들입니다.     


“사실 제 본심을 말씀드리면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저는 공부하는 것이 정말 좋습니다.”

“공부를 하고 있을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놀고 싶은 욕구보다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것이지요.”    


나이가 들면서 재미있어하는 일이 변해간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20대에 좋아하던 일과 30대에 재미있던 일 그리고 40대에 들어서의 관심사가 계속 변해 갑니다. 지난번 <인생 수업>을 읽고서도 말씀드렸지만 공부가 놀이가 되면, 독서가 즐거움이 되면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스트레스를 다소 받는다 해도 그것은 ‘행복한 고통’입니다. 공부를 하고 있을 때가 가장 즐겁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저도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오토마톤화 된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는 사람의 기억과 의식의 내면은 텅 빈 채 단지 그날그날의 행위만이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 오토마톤화 된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고, 지적 욕구를 항상 새로운 것을 향해 돌리는 인간이야말로 지속적으로 내면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반복은 권태를 불러옵니다. 지나간 것은 지루합니다. 새로운 것, 배움과 모험만이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 지식인의 본질입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정신세계나 독서관이 독특합니다. 테마가 잡히면 3m 높이의 관련 자료를 쌓아놓고 본다니, 과연 ‘일본의 초지성’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듯합니다. 소설류는 읽을 틈도 없고 읽고 싶지도 않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저와 닮아 있습니다. 점점 재미있어집니다.      


저로 인해서 당신이 배움을 얻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서 변화하는 것. 그것이 저의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2007 4.6     산비       



‘고양이 빌딩 전말기’를 쓴 무대 미술가 ‘세노 갓파’의 글을 읽으며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다치바나를 대하는 그의 자세도 그렇고, ‘이왕에 독을 마셔야 한다면 그 그릇까지 삼키겠다.’는 표현이나, 며칠 동안 철야 작업을 해도 멀쩡한 다치바나의 보조를 맞추자면 생명이 단축될 우려가 있으니 ‘나도 조심해야지...’ 하는 글의 마지막 구절이 어찌나 우습던지.      


“인간은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내 경우, 하고 싶은 일이란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보는 것뿐이다.”    


다치바나에게도 책을 읽고 싶은데 먹고사는 일 때문에 책상에 쌓여 있는 책을 읽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프로네 님이나 저나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바쁜 일과에 쫓겨 책을 많이 읽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요. 하루의 일과 중 온전히 나를 위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의 절반은 책을 읽는 데 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소 하루 두 시간 정도는 온전히 독서에만.     

 

“문자로 표현되어 있는 저자의 심오한 세계로 내 정신이 빨려 들어가, 그곳에서 언어를 초월한 대화를 나누며 하나의 정신적 드라마를 전개해 가는 독서 체험을 그동안 몇 번이나 했을까?” 프로네 님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책에 빨려 들어간 체험이 몇 번이나 있으셨는지요? ‘독서 삼매경’이란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가 봅니다. 책에 완전히 몰입하여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져 보는 것. 그런 몰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끊임없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보는 것,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반복하고 피드백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날 정신적인 비상을 이루는 때가 찾아와 모든 것을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것.”    


사유와 피드백 과정이 빠진 관찰은 무용지물이라고 합니다. 삶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련과 시행착오 속에서 바른 길을 고민하고 사유하기를 매진한다면 언젠가 큰 깨달음을 얻고 도통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2007 4.9  당신의 도반  산비      



“여행을 하면 초라해진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혹은 낯선 타국 땅 가로등 밑에서 내가 왜 그렇게 싸우며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여행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일상의 피곤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 길을 떠나자. 내가 택한 길을 내 걸음걸이로 끝까지 가자. 떠나는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으므로...”  

  

산에 오를 때 보면 각자의 보폭이 있고, 리듬이 있고, 페이스가 있습니다. 마라톤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하면 후반에 무너지고 맙니다. 내 걸음걸이로, 내 리듬에 맞추어 꿋꿋하고 끈질기게 걸어가다 보면 결국 정상에 이르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산의 정상, 아니 중간에라도 도달해 있는 사람에게 한 걸음의 도움은 유용할 테지만, 산자락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정상의 의미를 알려준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일단은 발을 내디뎌 중간에라도 이른 사람에게는 정상이 어떠한지 설명해주는 것이 의미가 있지만, 산자락에만 머물면서 산에 왜 오르는지를 주저하고 있는 사람에게 정상의 의미를 알려준 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입니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기자 시절, 어떤 사람을 인터뷰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쓴 저작과 논문을 거의 모두 다 읽어보고 찾아갔다고 합니다.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하는 인터뷰는 깊이도 없고 상대도 건성으로 대답하기 마련이지만,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면 상대도 그때서야 진짜배기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조금만 더 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일의 강도를 조금씩 조금씩 더 높이다 보면 어느덧 몸은 거기에 적응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정신의 힘이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입니다.”    


산에 오를 때도 그렇고 마라톤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힘이 한계에 도달해도 정신의 힘이 그것을 극복할 수가 있음을 체험합니다. 어떠한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마지막 2% 남은 정신의 힘을 모으면 엄청난 초능력이 발휘됩니다.    


2007 4.10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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