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 일주(TMB) 4

트레킹 4일차

by 산비


: 베르토네 산장(Refuge Bertone,1989m) - 삭스 능선길(Mont de la Saxe) - 아미나(Armina) - 라 바쉬(la Vachey) - 아누바(Arnuva) - 엘레나 산장(Refuge Elena,2062m) - 페레 고개(Grand Col Ferret,2537m) - 라 쁄 산장(la Peule,2071m) 투숙


너무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고 만다. 지레 겁을 먹으면 일찍 포기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면 기회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변수가 어느 정도 상쇄되기를 기다렸다가 변화의 여지가 옅어졌을 때 결정을 내리면 일의 성공 확률이 올라간다. 여행은 모험이다.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을 때 허둥대지 않고 침착하게 임기응변의 활로를 찾는 것, 그리하여 전화위복의 반전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매력적인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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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플랜 A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원 계획은 베르토네 산장까지 치고 올라가서 산장 근처에서 야영을 하기로 계획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이번 트레킹에서 가장 길게 걷는 롱 데이로 설정, 새벽 4시에 기상해서 12시간을 걸어 라 풀리(la Fouly)까지 진격하는 스케줄이었다. 이번 트레킹의 모든 일정은 사실상 ‘라 풀리’에 초점을 맞추어 설계되었다. 라 풀리에 있는 캠핑장에서 빨래도 하고 휴식을 취한 후 버스를 타고 트리앙(Trient)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최고의 전망 중 하나라는 락 블랑(Lac Blanc)을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중간에 한 구간 정도는 버스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너무 무리한 계획을 세웠던 것일까? 피로가 서서히 누적되면서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 플랜 B -


지금부터는 플랜 B를 가동한다. 플랜 A든, 플랜 B든 그게 뭐 대수겠는가? 어차피 하루하루를 알차고 재밌게 즐기면 그만이다. 기록 경주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TMB를 종주하고야 말겠다는 의무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알프스 몽블랑을 원 없이 누리고 즐기면 그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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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밥부터 짓는다. 아침을 위한 밥이 아니라 점심을 위한 밥이다. 오늘은 롱 데이. 밥 먹는 식사 시간을 줄이고자 점심을 주먹밥으로 간단히 해결하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제 쿠르마유르에서 장을 보면서 가스 캔 사는 것을 깜박하고 말았던 것이다. 응급으로 화덕을 만들고 나무로 불을 때 밥을 지었다. ‘정글의 법칙’이 따로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아침은 치즈 퐁듀를 만들어 먹었다. 조금 남아있는 가스로 겨우겨우 요리를 완성했다. 크림 수프 베이스에 에멘탈 치즈를 넣어서 녹여주면 맛있는 퐁듀가 된다. 바게트 빵을 찢어서 찍어먹으니 맛이 아주 고소하다. 어제 장을 봐온 과일과 오렌지 주스를 곁들여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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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주변을 정리한 후 오늘의 여정을 시작한다. 원 계획에서 두 시간 정도 후퇴한 셈이다. 중간에 힘든 능선 길을 버리고 쉬운 계곡 길을 택한다면 시간을 벌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베르토네 산장(Refuge Bertone, 1989m) 까지는 고도 700m 정도를 치고 올라가야 하는 만만치 않은 오르막이다. 만약에 어젯밤 무리하게 산행을 밀어붙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민초들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가파른 오르막이라 한 번에 치지 못하고 중간중간 계속 쉬면서 올라갔다. 얼추 올라왔는지 쿠르마유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포인트에 도착했다. ‘우리가 저 밑에서부터 올라왔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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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토네 산장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언덕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많은 트레커들이 아침을 맞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양치도 하고 화장실에서 볼일도 보고 식수를 보충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 TMB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 -


이제부터가 이번 전체 TMB 일정 중에 가장 아름다운 절경을 보여 줄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바로 몬데 라 삭(Mont de la saxe) 능선 길. 보통 TMB 길이 산의 사면을 따라 허리로 길이 나 있는데 비해 이 구간은 완전히 산 능선 위에 올라타서 양쪽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걷는 길이다. 쿠르마유르에서 일정이 늦어질 때는 이 구간을 포기하고 버스로 라 바쉬(la Vachey)나 아누바(Arnuva)로 건너뛸 생각도 해보았었다. 그러나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고생한 만큼의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우린 이제 알프스 몽블랑에서 볼 건 다 보았다고 선언했을 정도로 멋진 풍광이 펼쳐졌다. 실로 경이로운 경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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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토네 산장에서 몬데 라 삭 능선에 올라서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200m의 고도를 단숨에 올려쳐야 하기 때문이다. 급경사의 오르막을 숨을 헉헉 내쉬며 전력을 다해 올랐다. 이곳만은 지그재그 길이 아니라 길이 수직으로 일어선 깔딱 길이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 이번 TMB에서 어디가 제일 힘들었는지 나에게 묻는다면 바로 이 구간을 들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힘들게 용을 쓰며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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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올라 선 이후로는 룰루랄라 걷기 좋은 능선 길이 이어졌다. 평지나 다름없는 올레 길을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조망이 좋은 곳에서는 오래도록 쉬면서 몽블랑을 만끽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장면, 장면이 그대로 작품 사진이다. 그렇게 길을 가다가 몬데 라 삭 능선의 끝에 다다랐다.


- 승부를 걸다 -


원래는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해발 2534m의 베르나다(Tete de Bernada) 봉과 트론쉬(Tete de la Tronche, 2584m) 봉을 넘어 사핀 고개(Col Sapin, 2435m)를 지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도를 펴서 면밀히 살펴보니 시간을 줄이려면 굳이 사핀 고개를 넘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베르나다 봉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목적지까지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지도에 전혀 길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것. 창의적인 발상이었지만 지도에도 없는 길을 찾아간다는 것이, 그것도 우리나라 산도 아닌 먼 이국의 산에 와서 모험을 하기가 무척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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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가 가려는 방향에 어렴풋이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지난 길이라면 길은 반드시 어디론가 이어져 있을 것이었다. 일단 페레 계곡을 좌측에 두고 나아갈 방위가 명확했기 때문에 길을 잃더라도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갈 확률은 낮았다. 지름길 개척에 성공한다면 한 시간 정도는 버는 셈이었다. 승부를 걸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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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길이 사면을 따라 가늘게 이어졌다. 몽블랑 산군을 감상하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길이었다. 이 길을 가다가 작은 시내를 건넌 후 왼쪽으로 하강하여 변형 TMB 길에 합류할 수 있다면 성공이다. 방향을 잡고 하산하다가 오래된 폐 목장 하나를 만났다. 길은 목장까지만 나 있고 이후로는 끊겨있어 쉽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리 살피고 저리 헤매다가 겨우 길을 찾아냈다. 빙고! 계곡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개울가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늘 점심은 멸치 김자반 주먹밥. 아침에 급하게 대충 만들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 비가 와서 -


이제 다시 정상적인 TMB 코스를 걷는다. 보나티 산장(Refuge W. Bonatti, 2022m)으로 가는 길은 포기하고 페레 계곡(Val Ferret)을 따라 걷는 길을 선택했다. 이미 보고 싶은 경치는 볼 만큼 봤다. 여한이 없다. 하산한 지점인 라 바쉬에서 아누바까지는 아스팔트 길이다. 버스도 다니는 도로다. 비도 내리고 하니 그냥 버스를 타고 가자고 들 하여 기다려보았지만 시간이 되어도 버스가 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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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에 지나가는 차를 잡고 물어보니 비가 와서 어쩌고 저쩌고 노 버스 어쩌고. “비 때문에 오늘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네” 하고 말을 전하니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비가 와서 버스가 안 다닌다고?” 뭐 이런 개뼈다귀 같은 일이 있나. 나중에 알고 보니 간밤에 큰 비가 내려 산사태가 나는 바람에 버스 다니는 길이 끊겨 버스가 운행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산사태 얘기는 못 알아듣고. 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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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비를 맞으며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잠시 우박을 동반한 소나기가 내리더니 이내 빗줄기가 잦아든다. 포장도로는 아누바까지만 이어져 있다. 이후로는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오늘의 목적지는 엘레나 산장(Refuge Elena, 2062m). 산장에 방이 있다면 오늘은 산장에서 그냥 묵을 생각이다. 많이들 지친 상태여서 일찍 산행을 마치고 산장에서 저녁도 먹고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비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은 방이 없다.


- 유행처럼 번지는 몽블랑 트레킹 -


엘레나 산장은 접근성이 좋고 경치가 좋은 곳이라 예약을 미리 하지 않으면 여름 성수기엔 방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게다가 오늘 밤엔 한국에서 단체로 온 27명이 투숙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히말라야 8000m 14좌를 등정한 바 있는 한왕용 씨가 이끄는 몽블랑 패키지 트레킹 팀이었다. 이 팀은 우리랑 같은 비행기로 같은 날짜에 와서 같은 날 출국하는 일정이라 오다가다 가끔씩 마주치곤 했다. 마침 아는 대학 동문 선배 한 분이 아들을 데리고 트레킹을 하고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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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삼사 년 전부터 몽블랑 트레킹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20년 전에 TMB가 유행해서 몽블랑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 뒤를 이어 한국에서 최근 들어 붐이 일어나고 있다. 잡지에 광고를 하고 단체 모객을 해서 팀을 구성한다. 보통은 12박 13일의 일정으로 TMB 종주에 나서고, 8박 9일로 하이라이트만 도는 상품도 있다. 사실 한국 여행사에서 상업적으로 모객을 하여 몽블랑 트레킹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한다. 현지 여행사를 통하거나 현지 가이드를 고용해서 트레킹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호회나 친구들끼리 와서 트레킹을 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 밤하늘의 별을 보며 -


가스가 없으니 엘레나 산장에서 어떡하든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산장 측에서 저녁 제공에 난색을 표한다. 투숙 인원에 딱 맞추어 재료가 준비된 상태라 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샌드위치 같은 거라도 먹을 수 없겠냐고 하니 그건 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 어쨌든 배를 채우자. 햄 치즈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일 인분의 양이 장난이 아니다. 한 개를 다 먹기가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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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왕용 대장에게 이후의 일정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쿠르마유르 산사태 이야기도 한 대장님을 통해서 들었다. 산장 주인은 산장 주위에서 텐트를 치는 것은 원래는 안 되지만 잠만 자는 것은 눈감아 주겠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비박은 2500m 위에서만 허용되고 그 아래에서는 불법이라고 한다. 나라마다 야영에 대한 규정이 조금씩 다르다. 프랑스는 조금 더 자유롭고, 스위스는 조금 더 엄격하다. 스위스에서는 반드시 허가된 공식 캠핑장에서만 야영을 할 수 있다. 한 대장님 말로는 페레 고개 정상에도 텐트를 칠만한 평지가 있긴 하지만 바람이 심해서... 하며 말을 흐리신다. 음식을 먹고 체력을 회복한 데다가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라 그냥 페레 고개 정상까지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정상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야영을 하자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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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 고개를 향해서 출발할 때만 해도 날씨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출발할 때부터 비가 내렸다면 정상까지 올라갈 생각을 접고 산장 주변에 텐트를 쳤을 것이다. 사실 엘레나 산장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햇볕을 피해 그늘을 찾아들어야 했을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그런데 이곳 날씨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구름이 조금씩 몰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날씨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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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쏟아지고 빗줄기가 굵어진다. 얼른 방수 바지와 고어재킷을 꺼내 입었다. 그동안 날씨가 좋아서 써먹을 일이 없던 탓에 쓸데없는 짐을 가져오게 했다고 원성이 자자하던 차였다. 그래서 장난으로 “비가 왕창 한 번 와야 하는데” 했었다. 이번에 제대로 비를 만난다. 방수 바지(오버 트라우져)는 비에 젖어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것과 신발 안으로 빗물이 들어오지 않게 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여기에 스패츠까지 장착하면 빗물이 스미는 것을 완벽하게 막을 수 있다. 신발 안에 물이 들어오면 꾸적 꾸적 아주 불쾌하고 불편해진다.


- 어떡해? 계속 올라가? -


비가 점점 더 거세졌다. 길을 타고 흙탕물이 콸콸 쏟아져 내린다. 덜컥 겁이 난 신 단장님이 잔뜩 긴장된 얼굴로 물으신다. “어떡해? 계속 올라가?” “그럼 어떡하겠어요. 계속 가야죠.” 다시 되돌아갈 순 없었다. 정 안되면 고개를 넘어 계속 전진해서 다음 산장이 나올 때까지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길을 따라 빗물이 콸콸 흘러내려 길인지 개울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선두와 후미는 점점 간격이 벌어졌다.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 힘겹게 겨우겨우 어찌어찌 정상에 올랐다. 페레 고개 정상에는 국경의 경계를 표시한 돌탑 하나만 덜렁 서있을 뿐이었다. 먼저 올라온 사람들은 비는 오지, 바람은 불지 체온이 떨어져서 아주 혼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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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얼이 나간 얼굴이다. 대충 사진 몇 장 찍고 하산을 서둘렀다.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올 때의 낭만적인 공중부양 샷 따위는 언감생심이다. 사진기를 드니 얼굴은 웃으려고 하는데 마음이 웃질 못한다. 모두 심란하기 그지없다. 스위스로 넘어오자 다행히도 비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고개 반대편은 경사도 완만해서 훨씬 걷기가 좋았다. 그제야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긴다. 일단 한 시간 거리의 라 쁄 산장(la Peule, 2071m)까지는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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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가 넘어 라 쁄 산장에 도착했다. 목장을 겸하고 있는 조그만 산장이다. 천만다행으로 자리가 남아있단다. 1층은 이미 자리가 다 찼고 우리는 2층 도미토리에 일곱 자리를 배정받았다. 하늘의 도우심이다. 가늘어졌던 빗줄기는 그날 밤 천장이 뚫릴 듯 또 한 차례 거세게 퍼부었다.


짐을 정리하고 샤워부터 한다. 얼마 만에 해보는 온수 샤워냐. 씻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개운해진다.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식당 거실로 모였다. 거실에는 장작 화목난로가 온기를 내뿜고 있다. 밤이 늦은 탓인지 다른 트레커들은 보이지 않고 우리뿐이다. 훈훈한 산장 거실에 모여 앉아 모두들 말없이 스위스 맥주를 홀짝인다. 무척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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