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 5일차
: 페레(Ferret) - 라 풀리(la Fouly,1610m) 캠핑장 점심 - 쁘라 데 포트(Praz de Fort) - 버스 - 이써트(Issert,1055m) - 샹페(Champex,1466m) 캠핑장 야영
어차피 해야 할 일이고 기왕 하는 일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하자. 불평과 불만은 불행의 씨앗이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일을 해도 마음먹기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 상태가 된다. 예기치 못한 일을 만났을 때 ‘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탄식하기보다는 긍정적인 쪽으로 해석하자.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좋다. 여행을 할 때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밤새 요란스럽게 비가 내렸다. 아마 밖에서 텐트 치고 잤으면 빗물에 떠내려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어제 산장에 투숙하기로 한 건 참 잘한 결정이었다. 오래간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편하게 잠을 잤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코끝에 닿는 아침 산 공기가 서늘하다. 산장 마당 아래 초지에서는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고, 건너 산에는 운무가 자욱하다.
아침은 어제 엘레나 산장에서 사 온 샌드위치로 때웠다. 커피랑 우유만 따로 주문해서 마셨다. 원래는 페레 고개 정상에서 아침에 먹으려던 샌드위치다. 별을 보겠다고? 참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었다. 우유가 달고 고소하다. 이곳 목장에서 직접 생산한 우유다. 아침에 산책하며 보니 젖소들을 줄 세워놓고 전동 유축기로 젖을 짜내고 있었다. 젖을 다 짜고 난 후에는 소들을 풀이 많은 초지로 몰고 갔다. 그 많은 소들을 검정개 두 마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전부 몰고 간다. 목동은 그저 “오잇 오잇” 하는 이상한 소리를 가끔씩 낼 뿐이다.
아침을 먹고 좀 더 쉬기로 했다. 쉬는 김에 푹 쉬자. 다른 팀들은 모두 떠나고 우리만 산장에 남아 침대 위에서 하릴없이 뒹굴었다. “우리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거야?” 10시까지 한숨 더 자면서 쉬기로 했는데 다들 좀이 쑤신 듯 오래 누워있질 못한다. “그려 그럼 그냥 출발합시다!” 짐을 정리한 후 9시 30분에 길을 나섰다.
오늘은 샹페까지 운행하고 그곳 캠핑장에서 야영을 하려고 한다. 스위스의 전통마을을 지나고 고도차가 별로 없는 평지 같은 산길을 걷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 샹페 마을 직전에 고도 400m 정도를 치고 오르는 것만 해내면 된다. 그러면 오늘 일과 끝이다. 대략 오전 3시간, 오후 4시간 정도 걸으면 될 것으로 예상했다. 7시간도 적은 시간은 아니지만 매일 10시간 이상 걸은 걸 생각하면 휴식 같은 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너무 힘들 게 걸어서 오늘은 좀 여유 있게 일정을 진행하고 싶었다. 어차피 플랜 A는 이미 물 건너갔다.
걷는 것은 수월할지 모르겠지만 조망이 별로 없는 길이라 사실 이 구간은 버스로 건너뛰려고 했었다. 마침 버스가 운행되는 길이기도 하고. 그런데 대원들은 오늘의 걷기 길에 더 열광한다. 이런 길을 원했다면서. 몽블랑 경치는 이미 볼만큼 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리다.
라 쁄 산장에서 페레(Ferret)까지는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페레에 거의 다 왔을 때쯤 산비탈 아래에서 포클레인 한 대가 열심히 길을 치우고 있다. 간밤에 산사태가 났었던 모양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으니 폭우가 내리면 산사태가 날 만하다. 사실 어제 라 쁄 산장에 빈자리가 없었으면 걷기를 계속 진행하려고 했었다. 만약 그랬으면 어떻게 됐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페레부터는 포장도로가 나있고 버스가 다닌다. 버스의 유혹을 물리치고 길을 걸었다. 전형적인 스위스의 전통 가옥들이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다.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뽐내는 아름다운 집들이다.
라 쁄(la Peule)에서부터 한 시간 반 정도 걸어서 라 풀리(la Fouly, 1610m) 마을에 도착했다. 마트와 산악 장비점이 있고 캠핑장이 소재한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다. 카페에 들러 짐을 내리고 잠시 쉬면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이 정도의 사치는 좀 부려도 되지 않을까? ‘몬테 비앙코’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탈리아어로 ‘흰 산’ 몽블랑을 이르는 말이다.
장비점에서 가스도 사고 마트에서 찬거리도 마련하여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직원에게 점심을 좀 해 먹고 가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캠핑장 뒤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넓은 평지가 있다고 그쪽으로 가라고 한다. 피크닉만 하는 구역이 따로 있는 듯하다.
점심을 먹고는 그늘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막간의 휴식이 꿀맛이다. 햇볕이 좋아 젖은 침낭이며 옷가지들을 볕에 내놨더니 금방 말랐다. 파이팅을 외치고 오후의 일정을 시작한다. 네 시간만 걸으면 호수가 있는 샹페 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길은 캠핑장을 뒤로 돌아 빙하수가 흘러내리는 우유 빛 강물을 따라 이어진다. 캠핑장 뒤편에 널찍한 야외 수련장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강 건너편 푸른 언덕에는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평화롭다. 그야말로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들이다.
얼마 안 가 길가에 멋진 폭포가 나타났다. 우리나라에 이 정도 높이의 폭포가 있었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관광지로 개발되어 주말이면 차가 미어터지고 사람들로 북적였을 게 뻔하다. 이곳에서는 그저 외로운 무명 폭포일 뿐이다. 폭포를 지나 숲길로 접어들기 직전에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한 무리의 팀을 만났다. 그들은 TMB를 시계 방향으로 걷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에게 양보하며 길을 터준다. “땡큐” 감사의 눈인사를 보냈다.
쭉쭉 뻗어 오른 잣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숲길을 걷는다. 나무가 우거진 흙길이 무척 걷기 좋다. 마치 지리산 둘레 길을 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다들 TMB 최고의 걷기 길이라며 좋아한다. 사실 이 구간은 조망이 없어서 건너뛰려고 했던 길이었는데 참 아이러니하다.
한 시간에 한 대밖에 없는 버스를 놓쳤다면 기다렸다가 다음 버스를 타면 된다. 기다림의 시간을 짜증스러워하지 말자. 기다림, 그 자체로 그것은 하나의 에피소드고 완결이다. 지금에 집중하고 과정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조바심, 불안감, 박탈감, 이런 것들이 불행의 씨앗이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눈앞의 작은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나간 것들에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 행복의 토대이다. 오지 않은 것을 욕망하지 말고, 지나가는 것은 그냥 지나가게 놔두자. 돌아오면 받아주고 돌아오지 않으면 떠나보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기다리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듯이...
쁘라 데 포트(Praz de Fort) 마을에 도착했다. 이제 두 시간만 더 가면 된다. 맥주나 한 잔 하고 가기로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구멍가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골목 사이사이로 TMB 마크를 따라 걷다보니 갑자기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는 중에 버스 한 대가 바로 도착했다. “혹시 샹페에 가나요?” 간단다. 대원들이 환호작약이다. 멋진 길들은 다 걸었고 이제 400m 정도 고도를 올려야 하는 일만 남았는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셈이다.
버스를 타고 십여 분쯤 갔을까?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 웅성웅성 모두 버스에서 내리는 분위기다. ‘여기가 샹페인가?’ ‘아직 샹페 아닌데...’ 보니까 이써트(Issert)라는 마을인데 이곳에서 버스가 50분간 정차했다가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 버스 기사님 점심시간이라도 되는 걸까? 급할 것도 없는 우리는 마침 잘됐다는 심정으로 마을 복판의 주점에 들러 생맥주 한 잔씩을 들이켰다. ‘그렇지 않아도 맥주 한 잔 하고 싶던 차인데 잘됐네 뭐.’ 크크크. 웃음이 나온다.
휴식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샹페 가는 오르막 도로가 장난이 아니다. 굽이굽이 대관령 고개를 넘듯이 버스가 이리 틀고 저리 틀며 고개를 오른다. 교행이 안 되는 좁은 길이라 고난도의 운전기술을 요한다.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뒤로 물러섰다가 틈을 만들어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운전이 예술이다. 한참을 그렇게 묘기 대행진 중인데 뒷좌석의 손님들이 뭐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버스가 서고 기사가 내린다. 버스에서 함께 내린 사람들이 어디론가 몰려가서 무얼 들고 온다. 뭔가가 버스 화물칸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어라! 가만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물건이다. ‘저거 내 배낭이잖아?’ 헐. 배낭이 버스 아래 화물칸 문이 열리면서 길가에 떨어진 것이었다. 만약에 배낭이 언덕 아래로 굴렀거나, 샹페에 도착할 때까지 배낭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그냥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도 배낭을 찾았으니 천만다행이다. 배낭 외피가 조금 긁히긴 했지만 멱살 잡고 소송을 할 상황은 아니다.
샹페는 우리나라 산정호수처럼 높은 산지에 호수가 있는 휴양도시다. 태양에 일렁이는 은빛 호수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호수를 보자마자 다들 탄성을 터뜨린다. 보트를 타는 사람도 있고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수영을 하던 아주머니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물이 차지 않다며 물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으로 유혹한다.
대원들을 호숫가에서 잠시 쉬게 하고 마트에 들러서 오늘 저녁 먹을 고기와 내일 아침 카레에 쓸 채소들을 구입했다. 맥주 캔 몇 개와 위스키 한 병도 바구니에 담았다. 장보기를 마치고는 내일 아침 버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렀다. 안타깝게도 문이 닫혀 있다. 안내판을 보니 안내소는 오후 5시까지만 운영. 이런. 길을 지나가는 할머니를 붙들고 버스에 대한 정보를 구한다. “여기서 트리앙 가는 버스가 몇 시에 있나요?” “버스? 없는데” 엥 “그럼 샤모니 가는 버스는요?” “샤모니 가는 버스 없는데” 헐 그럴 리가. 내일 아침 다시 확인해보기로 하고 일단 후퇴다. 머리가 싸해지며 불길한 기운이 엄습한다.
샹페 캠핑장은 호수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인당 15유로의 요금을 지불하고 자리를 배정받았다. 텐트당이 아니라 인당으로 요금을 낸다. 캠핑장 주인에게 다시 버스에 대해서 물어보니 영어가 잘 안되는지 버벅거린다. 뒤에서 수속을 기다리던 꺽다리 청년 둘이 대신 통역을 해주었다. 트리앙이나 샤모니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다는 것이다. 절망적이다. 분명 구글 맵 ‘길 찾기’ 기능을 통해 버스가 있는 걸 확인했었는데...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던 한 노신사가 딱해 보였던지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나선다. 구글을 검색하더니 메모지에 일일이 적어주신다. 샹페에서 버스를 타고 오리시스(Orisieres)로 가서 거기서 버스를 갈아타고 마르티니(Martigny)로 간 후, 기차를 타고 어디로 가서 거기서 다시 기차를 바꿔 타면 샤모니로 갈 수 있다. 이런 제길. 그러니까 샹페나 라 풀리에서 샤모니로 갈 수는 있지만 그게 바로 가는 직행버스가 아니고 갈아타고 또 갈아타고 해야 갈 수 있는 거였다.
일단 사이트를 구축하고 텐트를 설치한 후 샤워부터 했다. 정신 좀 차려보자. 이제 어떡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진다. 일정을 하루 늘릴 수도 없고. 마음에 결심을 한다. 대중교통을 포기하기로. 내일 걸어서 도보로 샤모니로 넘어가는 정면 승부를 한다. 트리앙(Trient)까지 걸어가면 6시간, 거기서 발므 고개(Col de Balme)까지 3시간, 고개를 넘어 르 투어(le Tour) 마을까지 2시간, 도합 11시간이면 해낼 수 있다. 오후 5시 전에 발므 고개에 도착하면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계획을 대원들에게 알리자 비탄의 목소리들이 쏟아진다. 단장님부터 한숨을 내쉰다. 지금 발목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화장실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발목을 겹질렸다고. 성철 님도 사색이 되어 목소리를 높인다. “택시는 없어요? 택시로 갑시다.” “요금이 얼마나 나와요? 내가 낼게요.” 하도 원성이 자자하고 택시 요구가 강력해서 다시 안내 데스크를 찾아갔다. “혹시 콜택시 전화번호 알고 계신가요?”
좀 전의 노신사가 다시 도와주셨다. 구글을 검색해서 택시번호를 찾고 직접 전화를 해서 흥정까지 하신다. 샹페에서 트리앙까지는 7명 밴 한 대에 170유로(22만 원), 샤모니까지는 300유로(40만 원)란다. 트리앙까지 택시를 이용하기로 한다. 픽업은 아침 8시 샹페 캠핑장 입구에서. 이로써 난제 하나가 해결되었다. 대원들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고기를 굽고 위스키를 돌리며 편해진 마음으로 저녁 만찬을 즐겼다. 마침 7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식탁이 마련되어 있어 식사를 하기에 아주 편리했다.
오고 가는 술잔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여행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슬퍼할 필요 없다.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을 택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 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 작은 일 하나에 행과 불행이 왔다 갔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