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 7일차
: 7시 15분 알렌로즈 출발 - 8시 30분 에귀 디 미디(Aiguille du Midi, 3842m) 케이블 탑승 - 12시 샤모니 귀환 - 점심 - 1시 공항으로 - 16:00 제네바 출발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기라도 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 할까 말까 고민되면 하고, 갈까 말까 고민되면 가라. 다른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비아냥대더라도 마음이 동하는 일이면 하는 게 좋다. 미친 짓, 그런 짓이 나중에 보면 재미나고 특별한 추억이 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일을 하면 온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여행을 가서 신나게 걷고, 맛있게 먹고,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년 걷기 여행을 떠난다.
비가 내리고 있다. 처마 밑으로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낭랑하다. 오늘은 샤모니에 오면 반드시 가봐야 하는 필수 코스, ‘에귀 디 미디’ 전망대에 가보려고 한다. 이 ‘에귀 디 미디’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일부러 샤모니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원래는 아침 일찍 기상해서 서둘러 첫 케이블카를 탈 계획이었다. 그런데 비가 오고 있으니 마음이 심란하다.
에귀 디 미디 전망대 케이블카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운행을 중단한다. 설령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더라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구름만 보다가 내려올 수 있다. 그래서 이날만은 날씨가 좋기를 빌고 또 빌었었다. 오늘이 정말 날씨가 협조를 해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날이다. 그런데 비가 오고 있다.
어제 확인한 일기예보에서는 오전에 구름만 조금 끼다가 오후 늦게 소나기가 오는 걸로 되어 있었다. 벌써부터 일어나 들락거리는 대원들에게 비가 오고 있으니 우선 좀 기다리면서 날씨를 관망해보자고 알렸다. 침대에 누워 샤모니 날씨 검색도 해보고 국내 뉴스도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산장에서는 무료로 와이파이를 쓸 수 있다.
다행히 서서히 비가 가늘어진다. 짐을 완전히 꾸려 방을 비우고 배낭은 숙소 창고에 보관한 후 길을 나섰다. 보조 가방과 방한복은 따로 챙겨 나왔다. 에귀 디 미디는 해발 3000m가 넘는 곳이라 추위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전망대로 가는 길에 동네 빵집에 들러 바게트 샌드위치와 빵 몇 가지를 구입했다. 다른 가게들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문을 열지만 빵집만은 이른 시간부터 영업을 한다. 한 아이가 큼지막한 바게트 빵을 안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마 심부름을 나온 모양이다. 이곳 사람들은 빵이 밥이다.
7시 40분쯤 전망대 매표소에 도착했다. 첫 케이블카는 7시 30분부터 운행을 시작한다. 매표소 앞이 한산하다. 산 정상부에 바람이 많이 불어 아직 운행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8시 반까지 기다려보란다. 이런. 만약에 더 늦어지면 전망대 관람을 포기해야 한다. 비행기 스케줄 때문에.
일단 후퇴. 매표소 근처에 문을 연 카페가 있어 커피를 곁들여 아침 요기를 했다. 샌드위치가 아주 일품이다. 다른 빵들도 맛이 훌륭하다. 진정한 파리 바게트의 풍미를 프랑스 현지에서 만끽한다. 사과와 복숭아도 몇 개 사서 후식으로 먹었다. 사과가 상큼하고 복숭아도 맛이 달다. 금발의 점원 아가씨가 아주 친절하다. 먹고 갈 거라고 했더니 직접 하나하나 씻어주고 잘라먹으라고 칼까지 내주었다.
아침을 먹는 사이 어느새 시간이 8시 30분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케이블카의 운행이 시작되었다. 표를 산 후 줄을 서서 입장한다. 요금은 왕복 6만 5천 원. 그새 사람들이 몰려들어 길게 줄을 섰다. ‘미리 줄을 서있을 걸 그랬나.’ 탑승이 늦어질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줄이 금방 줄어든다. 한 차 정원이 70명. 대충 어림잡아 한 50명은 한 번에 타고 내리는 것 같다. 정상까지 한 번에 가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갈아타야 한다. 중간 기착지에는 레스토랑이 있어서 산책을 즐기거나 가까운 곳으로 트레킹을 다녀올 수도 있다. 우리는 패스.
케이블카가 엄청난 속도로 정상을 향해 치솟는다. 창밖은 안개와 구름으로 여전히 시야가 좋지 않다. 제발 구름이 좀 걷혀야 할 텐데... 드디어 에귀 디 미디 도착. 구름을 뚫고 구름 위의 세상으로 올라왔다. 마치 손오공 인양 근두운을 타고 천상에 오른 기분이다. 발아래로 구름이 뭉게뭉게 깔려있고 구름 위의 하늘은 파랗기 그지없다. 눈을 뒤집어쓴 하얀 침봉들이 구름 위로 삐죽삐죽 솟아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얼굴에 닿는 냉기가 장난이 아니다. 온도계는 섭씨 4도를 가리키고 있다. 간밤에는 영하로 내려갔을 것이다. 산 아래쪽에 비가 왔을 때 여기는 눈이 왔나 보다. 하얀 신설들이 햇볕에 반짝인다. 모두들 신이 났다. 눈을 뭉쳐 눈싸움도 해본다. 한 여름에 하는 눈싸움이라니.
케이블카를 내리면 동굴을 지나서 밖의 테라스로 나오게 되어 있다. 중간에 있는 설동은 몽블랑 정상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장비를 갖추고 설원으로 나가는 곳이다. 건장한 청년 둘이 눈밭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겠냐고 했더니 멋진 포즈를 취해준다. 설동 밖에는 이미 출발한 산악인들이 하얀 설원을 러셀을 하며 걷고 있다. 나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욕망이 불끈 솟는다.
테라스 이쪽과 저쪽을 돌며 탐색을 마친 후 우리는 다시 표를 끊어 ‘파노라마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이 케이블카는 프랑스의 ‘에귀 디 미디’와 이탈리아의 ‘헬브로네’ 전망대를 연결하는 노선으로 설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4000m가 넘는 설산들을 눈앞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다.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동안은 운무가 자욱해서 별로 볼 것이 없었지만 프랑스로 돌아올 때는 정말 환상적인 파노라마 뷰를 만끽할 수 있었다.
헬브로네 전망대에 내려 다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설경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걸었던 이탈리아 쪽 산군들이 발아래로 조망되었다. 쿠르마유르 시가지도 한눈에 들어오고 멋진 경관을 보여주던 ‘몬 데 라 삭’ 능선도 손에 잡힐 듯했다. 우리가 저 길을 걸었었단 말이지.
헬브로네 전망대의 카페에서 이탈리안 에스프레소 한잔씩을 즐긴다. 여행 오기 전 약간의 찬조금을 보태주신 분이 계셨다. “멋진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산장에서 커피 한 잔 드세요.” 이보다 더 맞춤한 곳은 없으리라.
프랑스로 돌아가며 바라본 풍경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이래서 알프스, 알프스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카메라를 꺼내 들고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여길 둘러보고 저길 둘러봐도 모두 그림 같은 풍경이다. 케이블카 아래 설원에는 눈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굳이 정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저렇게 하루 종일 설원 걷기만 해도 얼마나 좋을까 싶다. 간혹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크레바스는 조심해야겠지만.
11시 30분에 출발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샤모니로 귀환했다. 편도로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올라갈 때는 구름이 잔뜩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니 내려갈 때는 샤모니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점심은 전망대 매표소 건너편의 금룡이라는 중국식당에서 해결했다. 마침 눈에 딱 띄는 장소에 있어 별로 고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메뉴판을 들고 고민하는데 보니 유리문에 한국어로 된 메뉴판이 따로 부착되어 있다. 탕수육, 짬뽕, 해물볶음밥, 만두... 와우.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다. 여섯 명은 짬뽕을, 한 명은 해물볶음밥을 시켰다. 그리고 탕수육 하나를 주문해서 같이 나눠먹기로 했다.
탕수육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양이 너무 적다. 요리 개념이 아니고 그냥 일 인분의 식사이다. 그다음으로 해물볶음밥이 나왔다. 한껏 기대한 것과는 달리 해물이라고는 껍질 벗긴 칵테일 새우 한 마리 달랑.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짬뽕은 허연 국물에 국수 면발이다. 뭔가 속은 느낌이 든다. 핫 소스도 뿌리고 칠리소스도 쳐서 빨간색을 내자 겨우 조금 비슷한 그림이 나온다.
점심을 먹고 슬슬 걸어서 알펜로즈 산장으로 돌아왔다. 1시 픽업 시간에 딱 맞추었다. 보관되어 있는 배낭을 찾아 다시 정리한 후 주인장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크 박현호 씨와도 인사를 나누고 기념사진 한 장을 남겼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되리라.
차가 문 앞까지 와서 픽업을 해주니 참 편리하고 좋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을 해둔 덕분이다. 기사는 영국에서 온 젊은 청년이다. ‘에든버러’가 고향이고 대학에서는 정치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샤모니에 온 지는 2년이 되었다고. 겨울 스포츠를 좋아해서 샤모니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여름에 이렇게 알바를 해서 겨울에 실컷 스키를 타는 모양이다.
여행기는 시간이 지나면 시대에 뒤떨어진 기록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역사적인 가치가 빛나기도 한다. 당시의 풍경과 풍속을 생생하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십 년 전의 히말라야는 그랬구나’, ‘십 년 전의 알프스는 이랬구나’ 하고 떠올려 볼 수 있게 한다. 내가 치열하게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려 애쓰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올 때처럼 한 시간을 달려 스위스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다. 토요일 오후였지만 특별히 교통 체증 같은 것은 없었다. 비장의 무기 쌀 포대로 야무지게 배낭을 싸서 수하물을 부쳤다. 짐이 분실되는 사고가 없었던 것에는 이 쌀 포대가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로써 여행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아무 사고 없이 여행을 마친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일 년간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한 사람이 꾼 꿈에 여섯 사람이 편승해서 일곱 명이 꿈을 이루었다. 시간을 쪼개 미팅도 갖고 팀워크를 위한 산행도 실시했다. 항공권을 예매하고 버스를 예약하고 코스를 예습했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지만 긴장되고 초조했다. 인원이 많으니 고민도 많고 신경 쓸 일도 많았다. 밤마다 잠자리에 누워 하루하루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다가 잠이 들었다. 알프스에 가기도 전에 이미 머릿속으로는 몽블랑을 열 바퀴도 넘게 돈 셈이었다.
혼자여도 좋았겠지만 함께여서 더 즐겁고 행복했다. 일곱 가지의 이야기와 일곱 배의 재미가 있었다. 한 사람이 농을 치면 또 한 사람이 그것을 받아쳐 웃음을 만들어냈다. 저 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들을 묵묵히 해냈다. 매일 그날의 수훈 선수를 선정했다. 일정과 코스도 합리적인 선에서 잘 조정되었다. 무엇보다도 날씨가 많이 도와주었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비가 내렸고 조망이 필요한 곳에서는 푸르고 화창했다.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국경선을 통과할 때 쏟아진 우박과 폭우는 지금 돌아보면 추억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꾸민 영화의 세트장 같았다. 그땐 정말 심각했었지만.
알프스에 다녀온 지 열흘이 지났다. 단지 며칠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몇 달은 족히 흐른 듯 아득하다. 가까이 붙잡아두고 싶은 기억들이 오히려 먼 북소리처럼 아스라한 연유는 무엇일까? 그리움과 애착은 멀어지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강력해지는 법. 이 아득함은 더욱 강렬한 그리움을 욕망하는 내 영혼의 속임수일지도. 그렇게 나는 지금 스스로 지독한 그리움의 노예가 되어 과거의 환영 속을 헤매고 있다. 너무나 그립다. 그 길이, 그 언덕이. 꿈만 같은 여행이었고 아직도 꿈을 꾸는 듯하다. 언젠가 다시 한번 가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땐 더 꼼꼼하고 알차게 여행을 즐길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