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전사 1

by 산비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전체 1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제1장 ‘속도의 경이, 시공간의 재배치’를 읽었습니다.

저자는 “분명히 발송했는데 수신되지 않은 메일이 있다. 그 편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은 과연 존재하는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은 아득한 과거의 별이라는 사실. 이런 예를 들며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의문 사항을 지적합니다. 결국 근대화란 이 시공간에 대한 개념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근대란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근대화의 길목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것은 사람들의 인식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와 결국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철도를 통해 공간은 살해당했다./ 공간을 얇게 펼친다는 건 수많은 ‘사이 공간들’의 소멸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제 <열하일기> 같은 여행기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 여행기가 특별했던 건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이 공간들로 인해서다.”


“기차의 이러한 직선성은 그것이 펼쳐놓은 평면 위를 자유롭게 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그 평면의 확장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폭력적으로 동일화하려는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저자가 공간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매체가 ‘기차’입니다. 무수한 사이 공간들을 소멸시키고, 모든 것을 폭력적으로 동일화해버리는 것. 그것이 기차의 힘입니다. 중국이 그 많은 희생과 돈을 들여 티베트까지 기차를 이어놓은 것도 같은 목적일 것입니다. 기차의 힘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결국 문명과 비문명 사이의 경계는 시간을 얼마나 잘게 쪼개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어떤 태도로 전유하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느림은 일종의 유목 주의에 비유될 수 있다.”

시간, 속도란 빠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속도의 신앙에 지배되어 조급해지면서 우주와 교신할 능력도, 자연과 감응할 힘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느림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느리다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와호장룡’의 리무바이가 펼치는 무공을 예로 듭니다. 그의 몸놀림에서 속도를 느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느린 것은 아니지요. “고정된 정착점을 거부하고 계속 변이의 흐름을 만들면서 순간의 강렬도를 높여가는 노마드의 리듬!” 바로 그것입니다.

“시간의 유목주의란 코드화 된 방향을 벗어나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 삶과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질적인 집단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때 속도, 균질화, 화폐의 삼중주는 깨어진다.”


“노마드의 여정에는 목적지가 없다. 아니, 여정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해야 맞다. 따라서 그는 여정마다에서 마주치는 온갖 대상들과의 능동적 접속을 시도한다.”

책을 읽으며 ‘노마디즘’의 신봉자이신 프로네 님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님이 이 책을 읽으시면 참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들이 책을 더 집중해서 재미있게 읽게 합니다.

퇴근할 시간이 되어 가네요. ‘일요 다큐’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히말라야 ‘고쿄’의 호수 정말 아름답지 않던가요? 호숫가에 텐트를 치고 광대한 자연을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생각만 해도 멋진 일입니다. 마지막 날,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정상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디디며 거칠게 내뱉던 숨소리. 그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전율이 흐르고 눈물이 나더군요. 마치 내가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아, 언젠가 저도 반드시 히말라야에 오를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그래도 이 지구 상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한번 보기라도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6 7.5 히말라야에 가고 싶은 산비



<나비와 전사> 제4장 ‘연애의 정석, 죽거나 권태롭거나’


‘멜로의 순정과 씁쓸한 권태, 근대적 연애는 이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근대 이후 우리 문화의 핵심 코드는 사랑이다.’라는 명제 하에 저자는 근대의 소설과 드라마들을 예로 들며 근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성의식과 자의식의 세계를 설명해 나갑니다. 그 과정에 1930년대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하루>가 등장하고, 공지영과 은희경이 언급되고 ‘겨울연가’, ‘천국의 계단’, ‘대장금’을 분석합니다.

성의 자유와 해방이 일상적 단어가 되어버린 현대에도 오히려 섹스는 ‘죽어도 좋아’가 아니라 ‘죽지 못해 하는’ 것이 되어버렸고, ‘성의 해방’을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도시적 권태를 견디기 어려운 이들의 피난처로 전락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사랑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아득한 ‘천국의 계단’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신화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포르노가 판을 치는 일본, 20세기 후반 고도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한없이 메마르고 건조한 삶을 견뎌온 일본인들에게 <겨울연가>의 ‘욘사마’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화신으로서 일종의 경이를 느꼈으리라고 저자는 유추합니다.


근대적 성적 판타지가 문제적인 것은 성욕이 모든 욕망의 중심을 차지해버린데 있습니다. 사랑을 운명적 만남과 불치병 아니면 불의의 사고 같은 죽음을 통해서만 증명하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대장금>에 나오는 ‘장금이의 사랑‘을 높게 평가합니다.


“그녀의 사랑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다. 분명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에도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그 사랑은 두 연인뿐 아니라 그 연인들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살린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녀가 ‘길 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금이는 일찍부터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에 목숨 걸고, 사랑 때문에 일을 내팽개치는 게 아니라 궁중에서건 유배지에서건 늘 뭔가를 배우고 터득해나갑니다. 어디에서건 새로운 스승을 만나고, 동료들과 깊은 우정을 나눕니다. 그녀의 사랑은 그것들과 함께 갑니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삶의 모든 과정을 멈추게 하고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사랑들과 함께 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진입하는 과정이었다고 고미숙 님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2006 7.10 산비


요즘 신문에 <‘연금술사’ 작가 코엘료의 러시아 횡단 이야기>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역시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의 명성을 실망시키지 않는 영혼이 담긴 글들을 적어 보내줍니다.

코엘료는 묻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른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올바르다’는 기준은 대체 누가 세운 것일까요?” 신은 어떤 양식도 따르지 않고 그가 느끼는 대로 기린과 코끼리와 개미를 창조했는데, 우리가 신의 뜻대로 살려한다면, 왜 굳이 하나의 모범을 따라야만 하는지 반문합니다.

코엘료는 오늘 가졌던 의견을 내일도 그대로 고수하려 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면 매 순간 당신의 의견을 바꾸어 보라고 권합니다.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그들은 그들 방식으로 생각하게 될 테니, 다른 이들이 어떻게 여기건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긴장을 늦추십시오. 우주가 우리를 감싸 안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놀라는 기쁨을 발견하도록 하십시오.”


태풍이 물러간 모양입니다. 어제는 대단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게는 죄송스럽지만 가끔은 그런 바람을 맞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바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바람을 맞이합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2006 7.11 산비


<나비와 전사> 제5장 소월과 만해, ‘여성-되기’의 두 가지 스펙트럼


이 장에서는 김소월과 만해 한용운의 시에 나타나는 은유적 메타포를 풀어가며 근대의 여성성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저자가 한 때는 문학평론을 한 적이 있었다더니 글의 문체가 비평문을 읽는 느낌을 줍니다.

고미숙 님은 ‘여성-되기’가 노마드의 탈영토화 운동으로 이어지려면 필히 ‘유머의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대상과도 접속할 수 있고 끊임없이 자기로부터 떠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유머러스한 신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가늘게, 때로는 거세게 비가 몰아칩니다. 아침에 우산을 받쳐 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닥에 물이 고여 제법 큰 웅덩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수면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립니다. 빗방울 방울마다 떨어지는 속도가 제각각입니다. 약간의 시차가 발생하고 따라서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동심원의 크기도 다양합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수면에 어떤 디지털 장치를 하여 마치 피아노 건반처럼 음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한다면 어떤 소리가 날까? 가만히 상상해 보았습니다. 하나의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떠올랐습니다. 때로는 가늘게, 때로는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처럼 때로는 감상적인 때로는 격정적인 소리의 향연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2006 7.12 비 내리는 수요일 저녁에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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