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전사 2

by 산비


<나비와 전사> 제10장 18세기 지성사에 관한 두 개의 ‘첨부파일’


이 장은 ‘9장 근대적 앎의 배치와 국수’ 편의 부록에 해당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간의 이른바 ‘한국학’에 대해서 논합니다. 고미숙 님의 역사관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근대는 전적으로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며 번개처럼 느닷없이 도래한 것일 뿐 어떤 내적 준비나 연속성 따위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근대 계몽기와 조선 후기 사이에는 연속이 아니라 과격한 단절과 비약,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나아가 고미숙 님은 역사가 진보한다는 관념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각각의 연대를 불연속적으로 절단하고, 그 시대적 특이성 및 담론적 배치의 차이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투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앎의 새로운 출구가 보일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저자는 역사의 연속성 및 발전은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조선 후기 이후로 자본주의를 향해 꾸준히 발전되어왔으나 일제에 의해 굴절되어 심각한 손상을 받았다는 논리, 20세기 이후의 파행적인 현상은 모두 식민지배의 산물이라는 식의 논법을 비난합니다. 근세 들어 연속성과 리얼리즘, 민족, 근대, 문학의 개념들은 한 대 어우러져 ‘내재적 발전론’으로 정식화되며 그것의 산물로 ‘실학 담론’과 ‘국학’ 이론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저자가 근대주의와 민족주의의 결속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뒷부분에 첨부파일 형식을 빌어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마치 한 편의 논문을 읽는 듯합니다. 제목은 이렇습니다. <연암과 다산, 유쾌한 노마디즘과 치열한 앙가주망 사이>

연암과 다산은 동시대를 살았으며, 정조시대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들이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습니다. 배경과 출세의 길도 다르고, 글 쓰는 자세와 가치관도 판이합니다. 한마디로 연암이 사방을 매끄럽게 활주 한 유쾌한 노마드라면, 다산은 저 높은 이상을 향해 치열하게 질주해간 비운의 정착민이었다고 표현합니다.

저자가 평론가라서 그런지 노마드, 앙가주망, 아방가르드, 파토스, 레토릭 등등 현란한 수사를 동원해 글을 써나갑니다. 그래서 꼭 논문을 읽는 기분이 듭니다. 고미숙 님이 <열하일기>의 예찬론자여서인지 연암의 편을 더 들어줍니다.

“연암은 서재에 앉아 머리로 사유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말 위에서 또는 산정이나 벌판에서 단어와 문장들을 만났다.” 이것이 또한 프로네 님이 추구하는 노마드의 정신 아닙니까?

인용된 글 중 정화 스님의 좋은 글이 있어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생생한 삶은 명사화되지 않은 변화들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없습니다. 다만 변화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우주 법계의 춤이라고 합니다. 법계 전체가 맞물린 춤사위의 ‘우리’ 일뿐, 춤을 추는 주체가 따로 없습니다. 아울러 춤이 멈춘 적도 없습니다. 멈춤도 동작도 춤일 뿐입니다. 오히려 멈춤이 가장 극적인 움직임이 됩니다.”


비가 다시 내리고 있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2006 7.20 산비



<나비와 전사> 제11장 나비 또는 전사, 연암의 글쓰기와 ‘탈근대적 비전’ 탐구


‘한 달 동안 절대 글을 쓰지 말라’하면 당신은 행복하겠습니까, 불행하겠습니까? 저에게 한 달 동안 글을 쓰지 말라고 하면 저는 피가 말라죽을지도 모릅니다. 지식인에게 글은 공부의 최종 단계이자 생산성의 척도이며 존재의 표현 형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여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순간, 바로 존재의 무의미성에 직면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보다 글을 쓰지 않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쓰기의 전형이 단지 소설이나 시, 즉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제도적 장르에 구속받고 있음을 비판합니다. 그에 반해 연암의 글쓰기는 자유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과도 접속할 수 있고, 접속의 순간 바로 글이 탄생되며, 삶이 곧 글이고, 글이 곧 삶이 되는 경지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연암의 사유는 편폭이 대단히 광활하며, 그것들이 일정한 격자 안에 차분하게 배열되어 있지 않고 짧고 강렬한 편린들로 사방에 분사되어 있다 합니다. 주자주의가 주로 자연 속에서 불변의 원리를 찾으려 한 것과 달리, 연암은 천지자연 속에서 무수한 차이와 생성의 현장을 발견하여 글로 써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탈주체화’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즉, 나를 비워 남을 들이고, 마음을 맑게 해서 사사로운 생각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본래의 순수한 기운을 보존하고 천지의 운행과 마찬가지로 쉬지 않으면서도 어떤 행동에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어디서건 혼자서도 두려울 것이 없는 내공을 터득하게 되는 데, 이것이 탈주체화이고 충만한 신체를 말함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가둠으로써 생긴 밀폐된 공간에서 오는 편안함” 그것을 즐기셨던가요? 이제 그 외딴 다락방에서 걸어 나오십시오. 앞으로는 수많은 경계를 넘어 어떻게 외부의 약동하는 흐름과 접속하고 연대할지, 무의식의 심연 속에 깃들어 있는 우주적 파토스를 어떻게 자신의 내면에 끌어들일 것인지를 공부하십시오.


고미숙 님은 말합니다. 공부란 무릇 삶과 존재를 다 거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신체를 바꾸고, 삶을 바꾸고, 생사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것으로 우주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근원적 충동에 다름 아니라고. 그런데 공부는 스승과 도반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시덤불이 뒤엉킨 산 밑에서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할 때 그 덤불 사이로 난 길을 안내해주는 스승이 있어야 하며, 그 길을 같이 가는 도반, 즉 ‘코믠’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해 줍니다. 오늘 프로네 님이 저에게 했던 말 아닙니까? 인터넷으로 혼자 하는 공부의 한계에 대해서, 그리고 ‘학술 라이브’ 참가의 필요성에 대해서. 놀랍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미숙 님은 연암의 사상을 빌어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우주적 지평을 향해 달려가되,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걸림이 없는 충만한 신체가 되기를, 천지간에 흘러넘치는 ‘책의 정기’를 절단, 채취하면서 삶이 곧 글이고, 글이 곧 삶이 되는 노마드가 되기를.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06 7.21 당신의 師友이자 진정한 道伴, 산비로부터


“한 곳에 머무름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집착심을 경계하면서 길을 떠나는 수행자의 뒷모습은 늘 묘한 여운을 남긴다. 우리 인생의 고달픔과 괴로움은 그 원인이 무엇인가에의 강한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니까 여행이 우리 마음을 순화시키는 것도 바로 일상의 집착으로부터 떠남이 주는 마음의 여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늘 자유롭게 떠나기를 갈망하는 노마드, 프로네 님! 이번에는 또 어떤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지요?

누군가는 자신의 20대를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나의 20대 시절이 잘못 나온 사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멋진 곳을 여행하고 돌아와 사진을 뽑아 보니 초점이 잘못 맞춰지거나 심하게 흔들리거나 해서 하나도 건질 게 없는 사진 같다는 생각. 살았다기보다는 견뎠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 한 나의 20대.”


나의 20대는 어떠했나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30대는 또 어떠했었는지...


우리 인생의 역사도 고미숙 님의 말마따나 내재적 발전론에 의해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도약적으로 변화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 후기 사회에 서구 문명이 물밀듯이 들어와 민중이 개화, 계몽되었듯이, 무지의 세계에 있던 나에게도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의식 변화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성령이 임하는 순간 완전한 의식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지요.


어제도 잠깐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어떤 계기로 혼란을 겪고 변화하고 받아들이고,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그것이 삶의 실체적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을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정화 스님도 다만 변화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우주 법계의 춤사위 속에 우리도 동참하여 그 향연을 즐깁시다.

고미숙 님의 책을 다 읽고 난 전체적인 소감은 저자가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글쓰기의 정형화된 형식을 떠나 자유롭게 주제를 넘나들며 글을 써 내려갔다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연암의 글쓰기에서 영향받은 바 크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책의 두께에 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의 일관된 짜임새는 좀 부족합니다. 마치 여러 편의 논문을 짜깁기해놓은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고미숙 님이 우려하는 고착화된 편견일까요?

아무튼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이유로 고미숙 님의 글에 대한 안티 펜들도 있는 것 같고요. 책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읽고 느낀 바를 적어서 보내주세요. 지식인은 내용이 뭐든, 양과 질이 어떻든 간에 뭔가를 쓰고 또 써야 한다고 합니다. 적어도 지식인이라면! 즐거운 주말 보내십시오.

2006 7.22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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