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다 그리고 그를 만나다

by 산비


고미숙 님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질적인 마주침과 신체적인 변이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떤 화려한 여행도 타인에게 과시하기 위한 ‘레저’ 이상이 되기 어렵다.”


어제 여행을 다녀와서 일까요. 여행에 대해서 정의해놓은 글이 눈에 번쩍 들어옵니다. 여행을 하면서는 무릇 ‘이질적인 마주침’과 ‘신체적인 변이’를 경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했던 ‘예기치 못한 만남’이 바로 ‘이질적인 마주침’과 상통하는 말일 것입니다. 꼭 사람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과 자연현상이 만남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지 못했던 것, 듣지 못했던 것, 겪지 못했던 일들을 여행을 통해서 경험해보는 것. 그것이 여행을 통해 기대하는 하나의 목적이며, 여행을 앞두고 우리가 설레는 이유일 것입니다.


“지식이란 그렇게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사이를 넘나드는 ‘흐름’이다.”


‘흐름’에 대해서 말씀하시던 프로네 님이 생각났습니다. 아마 ‘고미숙 그룹’ 내에서 그들끼리 공유하는 몇 가지 공통 개념들이 있는 듯합니다.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면서 체득하고 정립해나간 결과물들이겠지요. ‘흐름’ ‘되기’ ‘유목’ ‘탈-화’ ‘사이’ ‘클리나멘’ ‘파토스’ 등등.


고미숙 님은 ‘유목’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푸른 초원 위를 유목하는 노마드입니다.


“잘못 들어서는 길이란 없다! 길이란 본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뿐.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길이 되기를! 나 또한 걸으면서 질문할 수 있기를!”


길은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합니다. 길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길에 대해서 사유하지 못하면 지식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담고, 끌고, 이고 가야 할 화두입니다. ‘길’


2006 8.21 산비



“슬픔의 밑바닥을 본 자만이 유쾌하게 비상할 수 있다.”


고미숙 님의 ‘열하일기’를 읽어나가다가 자꾸만 ‘들뢰즈와 가타리’에 부딪치게 돼서 잠시 책을 놓고 인터넷을 검색하였습니다. ‘들뢰즈-가타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고미숙’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 1925년 1월 1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925년 소르본느대를 졸업하고, 리용대 강사를 거쳤다. 1969년 주 논문인 《차이와 반복》, 부 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9년 푸코의 후임으로 68 혁명으로 만들어진 뱅센 실험 대학(이후 파리 8 대학)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곳에서 철학·문학·과학을 강의하고, 1987년 퇴임 후에는 줄곧 좌파를 옹호하며 집필과 방송활동을 했다. 구조주의 등 1960년대의 서구 근대 이성의 재검토라는 사조 속에서 철학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배경으로 서구의 2대 지적 전통인 경험론·관념론이라는 사고의 기초 형태를 비판적으로 해명하고, 1968년 《차이와 반복》에서 이 문제를 극복하는 문제를 전개했다. 1972년에는 동료 가타리와 함께 저술한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기존 정신분석에 반기를 들고, 니체주의적 틀 안에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통합하여 20세기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저서로 《경험주의와 주관주의자》(1953) 《니체와 철학》(1962) 《칸트의 비평 철학》(1963) 《천 개의 고원》(1980) 등이 있다. 한국에도 《앙티 오이디푸스》(민음사, 1994)와 《니체와 철학》(인간사랑, 1995)이 번역 소개되었다. 1995년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 네이버 <두산백과>


미셀 푸코는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사상은 20세기 인간의 지적 모험을 총합하고 다시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유체계이며, 들뢰즈 철학의 혁신성은 ‘사유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에 있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제까지 서양철학의 사유는 일종의 장기 게임으로 장기 말과 가는 길이 정해져 있는 닫힌 사유체계였으며, 철학은 감성-오성-이성으로 연결되는 일직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철학은 장기가 아니라 바둑의 체계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돌이 각자 주체로 다양한 길을 찾아가는 열린 방식으로.


그밖에 인터넷을 통해 들뢰즈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더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저술한 <천 개의 고원>은 음악, 미술, 국가론, 문학론, 정신분석 비판 등 다양한 주제를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게 질서도 무질서도 아닌 무수한 비질서가 공존하는 사유로 극한까지 밀고 간 들뢰즈를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합니다. 한번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보내주신 후기 글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살아가다, 그리고 그를 만나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일직선의 길 위에서 그를 만나 삶의 ‘흐름’이 급격히 꺾이는 ‘클리나멘’을 겪고 계신 것입니다. 끊임없이 탈영토화 하고 재영토화하는 것, 그것이 노마드적 삶의 본질입니다. 이제 그 내재화된 에너지를 바탕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당신과 동행하며...


2006 8.22 산비



어제 보내드린 메일은 잘 읽어보셨는지요? 시간에 쫓기다 보니 정리가 명쾌하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선 급히 보내고 퇴근하였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를 검토하면서 이들이 이루고 있는 한 사조를 ‘고미숙 그룹’이 상당히 신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미숙 님의 책에 등장하는 중심 용어들의 많은 부분이 이들에게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흐름, 주름, 되기, 기계, 유목, 탈영토화 등등.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보이는 것에서 숨겨져 있는 것들을 보려 한다.”

“시각조차 촉각처럼 만지고 직접적으로 느끼고 감응하는 유목적 여정의 산물이다.”


물론 표현의 과장됨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연암이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 갖는 호기심은 남다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만의 독특한 필체로 감각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바, 감탄을 자아냅니다.


“아아, 애석하구나, 이 좋은 달밤에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으니.”


연암은 달을 유난히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교교한 달빛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뉘 있겠습니까마는, 같은 달을 보면서도 그것을 즐기고 만끽하는 풍취가 문제일 것입니다. 매일 밤 달이 떠도 어찌 그 달이 어제의 달이고, 그제의 달이겠습니까? 매번 다른 달이 뜰 것입니다. 연암은 필시 매양 다른 그 달을 요리조리 관찰하고 음미하며 즐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을 테지요. 그래서 그 좋은 달밤에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음을 탄식했던 것일 겝니다.


연암이 열하행을 결정한 것은 18세기 지성사에 새로운 획이 그어지는 클리나멘의 순간이라고 고미숙 님은 말합니다. 산비가 프로네를 만난 것도 생에 획이 그어지는 클리나멘의 순간입니다. 생의 물줄기가 돌려지는 순간입니다. 흐름이 절단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속이 아니라 생성적 욕망입니다. 마흔에 접어들며 삶이 탈영토화 되고 재영토화되는 배치의 순간에 프로네 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저로서는 대단한 행운입니다. 당신과의 접속은 닫힌 경계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2006 8.23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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