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여름 비하고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매우 고혹적입니다.
로버트 엘린슨의 <장자 -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을 읽으며 출근하였습니다. 기존의 주석서나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 서양의 독자들을 위한 관점에서 쓴 책입니다. 장자에 등장하는 우화들의 순서를 재구성하는 다소 도발적인 실험도 하고 있습니다. 역자는 이것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장자에 대한 생산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시도로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장자>로 접근하는 하나의 독창적인 문이라 합니다. 하나의 문을 열어 보이는 것이 다른 문을 닫아버리거나 다른 문을 열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듯이, 이 책은 장자를 우리의 현실 속에서 문제화하고 다양한 담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하나의 계기와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앨린슨이 <장자>의 중심 주제로 단연 꼽고 있는 것은 독자의 ‘자기 변화’입니다. 그리고 그가 주목하는 것은 그 주제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장자의 방식입니다.
직접적인 서술이 아니라 환상적인 비유와 급소를 찌르는 우화들, 격랑 위를 매끄럽게 넘어가는 듯한 수려한 문체. 그리하여 ‘자기 변화’는 독자에게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인 동시에, 독자에게 현재적으로 실행되고 관철되어야 할 <장자> 자체의 목적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분서의 이탁오와 장자 그리고 맑스와 연암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맥을 이루며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고전학교>에서 이런 주제들을 선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名色, 명은 이름이고 형식이며, 색은 본질입니다. 본질을 추구해서 이름과 형식을 얻어야지, 이름과 형식을 좇아서 본질에 이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색이 없는 명을 흔히 ‘허울’이라고 이릅니다. 허울뿐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열정과 진정으로 삶의 본질을 파헤쳐 나갑시다.
2006 9.9 산비
<분서>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분서에 장자가 인용되고 있어 반갑습니다. 곤붕화언鯤鵬化焉 장자 첫머리의 이야기지요. 장자와 이지를 같이 공부해나가는 것이 무슨 연유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번 물어보아 주십시오. 주석이 충실하여 글을 읽는 재미가 제법입니다. 출전을 일일이 밝혀두고 있어 ‘아하, 여기서 나온 말이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됩니다. 더불어 알게 되는 곁다리 상식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탁오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이단이라 일컫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자조自嘲하기도 하고 자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이 쓴 책을 벗에게 보내면서 ‘절대 원본에 손을 대면 안 된다’고 하여 자신의 이론에 당당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단지 다른 이만을 의식하고 스스로는 위할 줄 모르며 오로지 좋은 평판에만 집착했지 내실을 닦는데 힘쓰려고 하지 않았다’며 겸손을 보이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가 굉장히 솔직 담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책의 역자가 번역을 멋스럽게 해낸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말과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논저가 웬만큼 괜찮다 싶어 스스로 흐뭇하고 한편으로 지기에게 보여 한 말씀 얻어듣고픈 욕심이 드는지라...’
탁오의 심경이 저의 마음과 같습니다. 아주 솔직한 말입니다. 저도 글을 쓰고 나서 한번 다시 읽으면서 글이 잘 써진 것 같으면 흐뭇하기도 하고 프로네 님에게 보여 한 말씀 듣고 싶어 지곤 합니다.
‘꽉 차야만 비게 된다.’는 말이 와 닿습니다. 무위의 無가 그저 없음이 아니듯이,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우는 것도 그저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마음의 청정함을 유지할 뿐 죽기 살기로 고요함을 찾지는 말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처자를 내팽개쳤다고 하는 비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1. 그러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것과 능력이 있는데도 스스로 원치 않는 것과는 다르다. 2. 미망에 빠져 오랫동안 허우적대는 바람에 모든 것을 늙어서야 깨달았을 뿐, 자신을 인륜의 밖으로 내팽개친 적은 절대 없다. 3. 각자 자신의 임무에 맞춰 성취를 일궈낼 뿐.
“출가를 했거나 안 했거나, 사람들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자신의 자질과 성정에 따라 일단 道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서로 어울려 함께 공부나 할 따름이었습니다.”
마치 ‘꼬뮌’의 정의를 내려놓은 듯한 문구입니다. 우리도 서로 어울려 공부나 합시다. 퇴근합니다.
2006 9.11 산비
이지는 情을 음양이 합치되어 만물을 배태하는 본질로서 인식했습니다. 情이야말로 모든 것을 창조하고 파괴시키므로 情을 강구해야만 만물이 조화를 이루며 각자의 성명이 바로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대자연에는 사랑이 충만해 있으며, 이것이 자연이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는 근본 요인이라고 파악했습니다.
<분서>라는 책의 제목은 이지 스스로가 작명한 것으로 나옵니다. 분노에 격발 된 언어가 많아서 읽는 사람에 따라 질책과 원한이 생길 수도 있겠으니 응당 태워서 없애버려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경중승(경정향, 경정리의 형)에게 답한 그의 글을 읽으며 비로소 이지가 왜 그리 말했는지 짐작이 됩니다. 적절한 논리와 비유로 때로는 통렬하게 경중승의 모순됨을 꼬집고 있습니다.
“공은 형해(눈에 보이는 겉치레)의 안으로만 얽매이시는군요.” “저는 공을 존경하겠지만, 제가 꼭 공을 닮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아 든 경중승의 표정이 어떠하였을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이지가 때로는 이단아로 불리는 것도 그의 문체가 이렇듯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던 데서 비롯됐을 것입니다.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생각들도 이지는 한번 비틀어보고 뒤집어보는 관점을 가졌습니다. 공자가 누구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성인군자로 받드는 공자에 대해서도 이지는 거침이 없습니다.
“공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자를 배우는 자들은 스스로를 버리고 반드시 공자만이 학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니...”
서여緖餘(실을 뽑은 뒤 남은 누에고치의 실밥 -사물의 잔챙이)를 풀어내는 자가 상황을 정돈한다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서여를 풀어낸 자들의 공을 사람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지만, 실재로는 그 사람이야말로 월등히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다.
양정견에게 보내는 편지도 참 재미있습니다. 진정으로 남을 대했다가 끝에 가서 몰락하게 되니 다만 너털웃음 한 번으로 아무 일 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시비의 와중에 끼어들면 급기야 원수가 되고 만다고 하고서는 내가 평소에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익히 저지르고 있구나 하고 반성합니다. 참으로 솔직한 언사입니다.
“도가 있는 사람을 가까이하면 정신이 서로 감응하여 이 마음이 저절로 바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쁨의 감응’입니다. 공자는 정직한 사람, 신실한 사람, 박학다식한 사람과 사귀면 이롭다 하였고, 이지도 어진 이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로 잡는 것이야말로 호학이라 이르며, 바야흐로 도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인재는 얻기가 어려우니, 실언은 할지언정 사람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프로네 님에게 저는 과연 공자가 말하는 이로운 벗이라 할 만하며, 더불어 담론 할 만한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그럼.
2006 9.12 당신의 도반 산비
9월 13일, 수요일 아침입니다. 이렇게 따로 밝혀두는 것은 오늘 하루를 특별한 마음으로 인식하기 위함입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이지만, 특별히 오늘 하루에 진정성을 부여하고 싶습니다.
현대인은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할 핑계를 먼저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삶의 진정성을 상실한 연극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앞의 개가 짖는 대로 따라서 짖고 있을 뿐입니까?
사랑을 이루는 것과 품위를 지키는 것은 양립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사랑은 준비되지 않은 감정이며 대책 없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절제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스릴 수 있다면 이미 그 사랑은 사랑이라 일컫기 어려울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사랑은 대부분 이런 ‘함량 미달’이라고 하네요.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입니다.
장자를 이해하기 위한 방식에 대해 앨린슨이 풀어놓는 설명이 독특합니다. 꿈보다 해몽 격으로 약간은 억지로 끼워 맞추는 듯한 느낌도 받지만 어쨌든 앨린슨의 설명을 밑바닥에 깔고 장자를 읽어나가면 장자 본연의 모습을 감지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앨린슨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장자 초반부의 배치는 장자가 우리의 분석적 인지 습관을 해체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형식이라고 주장합니다. 정말 장자가 그렇게 고도의 수법을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용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앨린슨이 말하는 대로 일단 수긍하고 장자를 바라보면 뭔가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가지게 됩니다.
원전과 평전을 같이 읽어나가니 그 재미도 쏠쏠합니다.
2006 9.13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