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와 멀어지지 않고는

by 산비

사막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합니다. 사막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지도 않고,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 변덕도 부리지 않는 외롭지만 품위 있게 몰락하는 법을 인간에게 가르쳐준다 하네요.

일본 돗토리현에 가면 길이 16km에 이르는 모래언덕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막을 없애기 위해 개간을 하고 식목을 하였지만 이제는 보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광자원으로 변모한 것이지요. 사막에는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많은 것을 보셨는지요. 그냥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은 다릅니다. 탑에 얽힌 사연, 건물이 세워진 내력을 알면 왜 그것이 거기에 자리 잡고 있고, 왜 그런 형식으로 지어졌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성장과정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몰랐을 때와는 그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지요.

모든 깨달음은 관조나 묵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체험과 절규로부터 샘처럼 솟아난다고 합니다. 삼국유사를 책으로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을 찾아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있는 앎을 얻고자 애쓰는 프로네 님에게 다시 한번 찬사를 보냅니다.


“글을 쓰지 않는 동안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입니다.


글쓰기는 막연하지만 지독한 불안과 무한히 표류하며 희미하게 지워지려는 ‘나’라는 존재를 간신히 붙드는 노력이라고 합니다.

어떤 작가는 내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정말로 일어난 일이란 느낌을 갖기 위해 글을 적는다고 하였습니다. 글을 쓰는 일에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매달려 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2006 8.26 산비



“세상의 어둠은 빛 앞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무엇을 자꾸 가르치고자 하는 책보다는 내가 하고 싶어 하던 말을 대신해 주는 책, 내가 하고 싶어 하던 고백,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나는 할 수 없었던 껄끄러운 고백을 대신함으로써 공범 의식의 체험을 통하여 내 죄를 닦아 주는 듯 한 그런 책이다.”

이윤기 씨는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을 빌어 자기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그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책은 곧 그가 쓰고 싶은 책이기도 할 것입니다. 책을 읽어나가며 이윤기 씨에게 점점 다가가는 느낌입니다. 소설이 아무리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해도, 결국 작가의 성장 과정과 가치관을 투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학교 공부와 멀어졌다는 것은 내 공부와 가까워졌다는 뜻일 수 있다. 하나와 멀어지지 않고는 다른 하나와 가까워질 수 없었다.”


하나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와는 꼭 멀어져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필연일까요?

우리는 그 다른 하나와 연결된 끈을 놓지 못해 힘들어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생생히 약동하는 삶의 리듬을 주도하는 길’을 발견하고서도 떠나지 못합니다. 선뜻 광야로 나서지 못합니다. 이것이 아니다 싶어도 그 현실을 박차고 나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창조적인 사람은 자기 삶을 위한 커리큘럼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오늘 읽은 책 내용 중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문구입니다. ‘자기 삶을 위한 커리큘럼을 스스로 짜는 일’ 이것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는 짜여진 대로만 살아왔습니다. 남이 짜 놓은 격자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간 길로만 따라서 걸었습니다. 이제는 나 스스로 내 삶에 맞는 교과과정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따라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 ‘고전학교’에 등록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삶을 엮어나가시는 프로네 님이 한없이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제가 프로네 님을 좋아하고 추종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기보다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의 관객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내 앞의 한 사람을 감동시키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다네요. 그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갑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2006 8.29 산비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찬 기운이 감돕니다. 바야흐로 가을의 문턱에 와 있음을 실감하는 아침입니다.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어정거리고, 길 잃고 헤매더라도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충실히 깨닫고 사는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법정스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손이 빚어낸 문명은 직선이지만, 본래의 자연은 곡선이라고 합니다. 인생의 길도 곡선이기 때문에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허나 모르기 때문에 또한 살맛이 나는 겁니다. 끝이 빤히 보인다면 무슨 살맛이 나겠느냐고 법정스님은 묻고 있습니다.


소설가 김훈 씨는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일까요? 닿을 수 없고, 건널 수 없고, 다가오지 않아서 애타 하는 그 모든 것.

작가 서영은 씨는 노년의 사랑을 젖은 장작에 비유합니다. 누가 척하면 속아 넘어가기는커녕, 속아 넘어가는 척을 하는 노회함이 오히려 지긋지긋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보고 싶어도 자신에게서나 상대에게서나 그런 ‘척’이 빤히 들여다보이니 무슨 수로 젖은 장작더미에 불을 지필 수 있겠냐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냥 그런 척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노자가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고 하는 것도 어설프게 아는 것을 가지고 아는 척을 하면서 사는 것을 질타하는 말일 것입니다.

노자는 인간의 소박素樸성을 무엇보다도 중히 여겼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소박(벌거숭이 인간)은 천진스러운 어린아이의 모습에 비유할 수 있다 합니다. 예수님도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는 관념이나 사상의 복잡한 조작을 알지 못하고 다만 자연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에 따라 울고 웃습니다. 우리 모두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어 진실 되게 삶을 살아갑시다.

2006 8.30 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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