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서 I (158-201p)
경사구, 경정향, 경중승 모두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지와 가깝게 지냈던 경정리의 형인데 이지는 유독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편지를 보면 초반에는 다정다감합니다. 상대를 살짝 띄워줍니다. 그리고 논리를 펴 나가면서는 아주 비참하게 깔아뭉개버립니다. 그러니 미움을 받을 만도 하지요.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공(경중승)은 진정한 친구라 할만하다. 우리는 참 인연이다. 친구끼리는 간언 하기가 어려운 데, 그래도 무슨 행운인지 공의 가르침을 입게 되니 참으로 상쾌하고 즐겁다. 친구끼리는 서로 격려하고 권면하면서도 화목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선비라고 말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말을 던져 놓고서는 뒤에 가서 구구절절 신랄하게 경중승의 이론에 대해 비평을 가합니다. 나중에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실제로는 제 좋은 것만 편애하면서도 말로는 범애汎愛와 박애를 들먹거립니다. 실제로는 자기 의견만 고집하면서도 자신만 옳다고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대놓고 스스로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한다고 훈계합니다. 즉 경계하고 근신하여 함부로 보지 않고, 두려운 듯 행동하여 함부로 듣지 않으며, 자신을 속이지 않고, 스스로 만족을 구하며, 혼자 있을 때 신중할 것을 당부합니다. 누가 대놓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아무리 선비고 친구라 해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부해라 마라 왈가왈부하지 말고 자신의 공부에나 신경 쓰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가히 불살라버리고 싶어 지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이야기들을 옛 고전을 인용하고 고명한 인물을 들먹이며 비유하니 그저 막말은 아닙니다. 그러니 더 열 받는 것입니다. 좀 심했다 싶은 것은 그의 제자 주유당에게 편지를 써서 너의 스승이 지은 죄업이 뿌리가 깊으니 간언하여 때를 놓치지 말고 성찰하게 해야지 안 그러면 완전히 절망뿐이라고 말합니다.
비록이지 본인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허물을 들춰내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자신을 관찰하여 허물을 지적해 달라고 말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이 이지와 같지 않으니, 이것이 이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는 이유입니다.
‘동시효빈(東施效顰) -추녀가 서시의 찡그린 모습을 흉내 내다 더 못생기게 보였다.’ <장자> ‘천운’ 편에 나오는 고사로 남을 모방하다 원래보다 더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입니다. 재밌죠?
겨우겨우 <분서> 권 1 ‘서답’을 마쳤습니다. 혼자 읽어나가려면 게으르고 지쳐서 힘들었을 텐데 프로네 님이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힘을 얻어 신나게 공부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도반이시여! 우리야말로 ‘不容已眞機’의 인연입니다. 그럼.
2006 9.13 당신의 사우 산비
* 분서 I (205-232p)
오늘 분서를 읽으면서는 문득 ‘니체’가 연상되더군요. 기성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질서에 냉소하고 신을 부정하는 도전을 했던 니체와 공자와 맹자가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당시 사회 기조에 거침없이 일침을 가하는 이지는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탁오는 공부한다고 하는 자들이 학문하는 목적을 오로지 명성을 더하고 이것으로 높은 관직을 얻고자 함에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합니다. 요즘 대학생들이 출세를 위해 오로지 취직시험이나 고시 공부에만 몰두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예전에도 그런 자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으면 학문을 내팽개치고 다른 공부하는 이들을 욕하기도 했었나 봅니다. 자신은 공부하려 들지 않으면서 되레 남을 비웃는 것에 대하여 통탄하고 있습니다.
이지가 말하기를 모름지기 학문이란 수시로 문제를 가늠해야 하며, ‘자신이 알아서 남의 강의를 찾아가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프로네 님도 강의를 찾아가 듣고 있으니 모름지기 학문하는 사람이라 할 만합니다. 하루를 공부하면 그 하루가 새로워지는데, 이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요 바로 전적으로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인재 얻기'와 '인재 되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논한 글이 인상적입니다. 공자의 인재에 대한 탄식은 실은 인재 얻기의 어려움을 한탄한 것이 아니라 인재를 아끼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한탄이었다고 분석합니다. 자고로 인재란 태어나기가 어려우니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재주가 큰 사람들은 자질구레한 일은 잘 모르고 어수룩하니 진정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 그와 더불어 말하고 아껴주어야 그 인재가 신임을 얻고 재주를 펼칠 기회를 맞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현실적이고 날카로운 분석입니다.
이지는 스스로 성깔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길을 가다가 부당한 일을 보면 칼을 빼서 도와주고 싶고, 옳다고 여기는 바가 있는데 풀지 못하면 갈수록 견고해지면서 응어리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죽을 날이 임박했는데도 같잖은 호기나 부리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으니 참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글을 통해 이지가 불심에 충천해 출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이 예순다섯이 되어 쓴 ‘주우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지난날에 불교에 탐닉하고 좌도에 빠져 지낸 것을 탄식하고 후회하면서 용서해주고 양식을 내주면 대종사 문하에 절을 하고 새롭게 공자 문하에 들어가겠다고 하니 이것이 진심인지, 허심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책을 읽어나가며 저의 얕은 지식이 한스럽기만 합니다. 기초 없이 탑을 쌓아 올리는 격입니다. 당시 시대 상황과 출전으로 삼고 있는 고전들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니 깨우침이 미진하고 수준이 낮습니다. 문장의 지엽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이탁오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통찰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무는 보았으나 숲은 헤아리지 못하는 형국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고전학교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분서 권 1 서답’의 발제문을 읽어보았습니다. 책 내용의 흐름을 잡아 이탁오를 논하는 글이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문장의 구사나 수사학적인 표현들도 뛰어났습니다. 저변의 바탕 학문이 잘 닦여져 있는 데다가, 이탁오에 대해 깊이 연구한 공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워졌습니다.
도대체 학문의 깊이는 어디까지란 말입니까? 물론 저야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유아에 불과한 처지이니 앎이 천박하고 짧다 하여 심히 부끄러워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새로이 고전으로 향하는 대문을 열고 학문의 길에 들어서 보니 저만치 앞에 가고 있는 이들이 있어 저들을 언제 따라잡나 하는 조바심이 일고, 그동안 어디서 뭐 하고 있었나 하는 원망이 드는 것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우보천리’의 마음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배우고 익히니 즐거울 따름입니다.
2006 9.14 당신의 도반 산비
* 분서 (232-259p)
고호두와 주공근의 관계 맺음이 본받을 만합니다. 둘 다 지혜와 어짊과 용기의 세 가지 덕목을 구비한 자들로 사람을 꿰뚫어 보면서도 자신이 아는 바에 현혹되지 않고, 남을 아껴줄 수 있으면서도 그 사랑에 눈멀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둘이 서로를 아껴주는 정리는 대단히 광범위했으며 아교 칠을 한 것처럼 단단했지만,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서로 해이해지지 않았다고 하니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탁오는 뭇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신을 시시각각 완성시켜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진약석美疢藥石’ 고통 없는 질병은 오히려 사람을 괴롭게 하는 입에 쓴 약만 못하다는 것이지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고통과 시련은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사람을 더 크게 합니다. 그럴 줄 알아야 하고요.
“마치 물속에 돌을 던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 표현이 참 감칠맛납니다. 이런 문장을 쓰려면 필시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물에 돌을 던져 보셨지요. 그냥 쏙 들어갑니다. 주공근과 淸淨寧一의 변화와 無爲自然의 쓰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하네요. 주공근의 인품과 학식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이탁오도 어쩔 수 없는 호구지책으로 관리직에 머물다가 비로소 박차고 구도의 길로 나섭니다. 도를 배우기 위해 선각자를 찾아 사방팔방 천지를 떠돕니다. 떠돌다 보니 고독과 괴로움을 삭여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허나 좋은 벗들을 만나면서 미친 듯이 내달리며 스스로를 고해에 던질 필요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무릇 구도의 길에는 반드시 훌륭한 도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 남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견식에 남녀가 있다는 말이야 어찌 가당하겠습니까?” 이탁오의 평등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해와 달은 항상 똑같으면서도 천고 이래 매 하루가 새로웠으며...” 매일 같은 해가 뜹니다. 그러나 매 하루는 늘 새롭습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탁오는 이점을 강조합니다. 세상의 가장 신기한 것은 평범 속에 존재하는 데, 속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평범과 일상을 미워하고 신기한 것만 찾아 헤매 다닌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으니, 지혜와 어짊과 용기 중에 지혜를 가장 우선으로 칩니다. 즐거움 속에 우환이 있고, 근심 가운데 기쁨이 들어있음을 옛글을 통해 다시 배웁니다.
탁오도 늦게 학문의 길에 들어서며 도를 향한 마음이 날마다 조급해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탁오의 마음이 저의 마음입니다. 앎에 대한 기갈이 심해질수록 생각이 급박해집니다. 그러나 과정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프로네 님도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좀 더 쪼개서 만들어보거나, 여의치 않으면 집중력을 높여서 단위 시간의 활용도를 배가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2006 9.15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