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 II 권 4 ‘잡술’ 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분서 I 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내용의 깊이가 심오해지면서 한 줄 한 줄 정신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글을 읽고 지나갔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와 읽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지는 세상의 모든 사상을 섭렵하다가 결국 ‘마음’, 心學으로 귀착합니다. 세상의 문제는 바깥에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해답을 찾아야 함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는 말년 심학과 불교의 유심론에 몰두합니다.
“경전은 해석하다 보면 뜻밖의 생각과 통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의미의 설명만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권 4의 초반부는 불교 경전에 대한 해설을 써 내려가는 데 좀 어렵습니다. ‘색’과 ‘공’에 대한 이야기들이 도무지 와 닿지를 않습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습니다. 글자는 눈에 읽어지지만 가슴으로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저의 우둔함이 한스럽습니다.
괴로운 번뇌가 있어 즐거움을 구하게 됩니다. 즐거움이 극도에 달하면 저절로 즐거움이 없어지면서 고통도 사라지고 공포와 몽상이 없어집니다. 장애물과 착란을 보고도 없다고 여겨버립니다. 억지로 공 안에 색이 없다고 여겨버리지만, 실은 색에 관한 생각이 서로 뒤섞여 뒤죽박죽 편치 못한 까닭에 공을 이루지 못합니다. 인위적인 공은 밝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본래는 공이 되고 싶었지만 오히려 색이 암암리에 연결되고 맙니다.
망색과 망상이 서로 뒤섞여 몸을 이루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망심이 쌓여 스스로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미혹의 오류에 빠져들면 나의 본심이 색신 안에 있다고 여기게 되어 이를 반드시 제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心相은 비워질 성질의 것이 아니니 이는 미혹에 또 하나의 미혹을 보태는 꼴입니다. 내 마음속 ‘空’의 의지와 ‘色’의 실체가 꼬리를 물 듯 돌고 돕니다.
이지는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무릇 이 모든 상이란 총체적으로 나의 진심 가운데 들어 있는 한 점 物相이니, 즉 물거품은 결국 망망대해 한가운데의 한 점 포말인 것이니 바다가 한 점 포말을 없앨 수 있다면 진심 또한 한 점 相을 제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진심이 색신을 껴안아 일체의 산하와 허공과 대지와 존재하는 모든 물상에 이르렀다면, 相이 마음이고, 마음은 색신의 안에 존재한다는 그 미혹 또한 깨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너무 어렵습니다. 프로네 님 좀 도와주십시오.
2006 9.28 당신의 도반 산비
“뻔히 보이는데도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딜레마가 있다. 경쟁과 효율이 추동력인 시대, 그러나 어떤 바보 같은 사람들은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때로는 바보스러움이 빛이 날 때가 있습니다. 잔머리 굴려보면 더 나아 보이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만 결국 나중에 보면 우직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밀고 나가는 것이 바른 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삶의 딜레마들. 그저 부둥켜안고 가는 수밖에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잔꾀를 부리기보다는 정도를 걸으면 그것이 비록 좀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 올바른 길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평생 아무 일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겼으나 일이 많은 것을 피하지는 않았다”
이지의 이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지는 일이 없는 것을 바랐지만 일이 많아도 잘 생활할 수 있었다면서 ‘나는 처한 환경에 잘 적응하고 안주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지가 말하기를
“스스로 헤아리기에 마음에 삿됨이 없고, 형체에 허물이 없고, 그림자에 티끌이 없을 때 ‘부끄럽지 않다’ ‘꿀리지 않는다’라고 한다. 내가 사실 이에 해당한다.” (평전 392쪽)라고 했습니다.
저도 부끄럽지 않고 꿀림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삿됨이 없다 함은 무슨 뜻입니까? 형체에 허물이 없다는 것은 외모를 말함입니까? 그림자에 티끌이 없다 함은 또 무슨 뜻입니까? 속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프로네 님의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에스키모인들의 언어에는 ‘훌륭한’이란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훌륭한 고래가 없듯 훌륭한 사냥꾼도 없고, 훌륭한 선인장이 없듯 훌륭한 인간도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모든 존재의 목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훌륭하게 존재할 필요는 없어”
존재의 목표는 그냥 존재이며, 사랑의 목표는 그냥 사랑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2006 9.29 산비
* 분서 II ( ~72p)
어제는 불경의 이치를 깨치느라 머리가 지근지근하더니 오늘은 재미있는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속목단학續鶩短鶴, 오리 다리는 비록 짧아도 그것을 늘여주면 근심이 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어도 자르면 슬퍼진다.”
진리의 말씀이지요. 긴 것은 긴 것대로 짧은 것은 짧은 것대로 다 쓰임새가 있게 마련입니다. 오리에게는 오리의 주둥이가 안성맞춤이고, 학에게는 학의 부리가 적합한 것이지요. 이 세상 이치가 그러합니다.
백아와 성련의 이야기도 울림이 있습니다. 백아가 성련에게 거문고를 배웠는데 삼 년이 지나도 정통하지 못하자, 성련이 제자를 데리고 바다로 가 바닷물의 출렁임 소리를 듣게 하고, 산으로 가 새들의 우짖는 소리를 듣게 했답니다. 그러자 이때부터 백아의 기예가 계발되기 시작해 마침내 천하의 고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지경까지는 배운 대로 따라 하면 되지만, 그 이상의 성취를 위해서는 결국 전해받은 예전의 모든 것을 더 이상 붙들고 있으면 안 되고 버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만의 독창적인 소리가 나오는 것이지요.
“만약 외경에 머물려면 응당 금강에 살아야겠지만, 마음에 머물려거든 멀리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설사 바다밖에 이르더라도 마음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할 것이다.”
이지의 제자였던 약무가 멀리 떠나려 하자 그 모친이 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내용이 가히 유심론의 진수를 밝히고 있어, 이지도 그 편지를 읽고 감탄하고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같은 곁다리들이 쏟아낸 신발 신고 가려운 발 긁는 식의 말을 돌아보면 하나같이 이치에 닿지 않는 헛소리들뿐이다.”
발이 가려운 데 신발을 신은 채 긁으면 어떨까요? 너무 재밌지 않습니까? 이 문구를 보고 혼자 소리 내어 실없이 웃었습니다.
“진짜만이 진짜를 알아보고, 진짜만이 진짜를 가까이하며, 진짜가 진짜를 그리워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니...” 우리도 진짜가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2006 9.29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