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사람이 아름다운 무늬를 감지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듯이 정신적으로 눈먼 사람 또한 아름다운 정신적 무늬들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이해하는 통찰력, 인지적 식별력을 지니고 있으면 사유의 아름다운 무늬도 동시에 볼 수 있다고합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눈뜬 자가 되어 장자가 의도하는 ‘인지적으로 의미심장한 뜻을 갖는 무언가’를 잡아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는 것처럼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변화 행위가 필요합니다. 독자들은 메시지를 수용하기 위해 미리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네요. 인화된 사진을 현상해내기 위해서 사진의 원판을 용해제에 넣어두는 것처럼.
이탁오 평전을 읽으며, 내가 분서를 읽으며 잘못 이해했던 몇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귀신론’도 귀신을 공경하자는 게 아니고 반어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하고, 정전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병식론’도 백성에 대한 언사가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제가 잘못 이해한 듯합니다.
이지가 책의 초반부에 경정향에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표현이 좀 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럴만한 사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전의 저자는 그 편지가 ‘중국 서신중의 최고’라고 할 만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평전에 분서의 내용이 많이 인용되고 있어 책을 두 번 읽는 복습의 효과가 있습니다. 차라리 평전을 먼저 읽어 예습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지를 공부해나가면서, 이지에 대해서 이지의 사상과 주장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를 더해가면서, 과연 이지는 본받을 만한 사람이고 따를 만한 사람인가에 대해서 문득문득 회의를 품게 됩니다. 반성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너무 파격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야말로 공맹의 가르침을 받든다는 미명 아래 인의도덕을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기어 올라가는 수단으로 삼는 ‘가짜 도학’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갑자기 비가 내리네요. 좋은 밤 되십시오.
2006 9.22 산비
세상에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기쁨만큼 흐뭇한 행복은 없습니다. 사랑의 꿈은 오로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행복하게 해 주려고 깜짝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곁에 있어주는 거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그냥 옆에 있어줄 수는 있습니다. 비를 같이 맞아줄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강한 사랑의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이지의 사상을 한마디로 개괄하자면 ‘自然之性’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성색 등의 인욕은 영웅이 업적을 세우는 것을 추동하는 동력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가짜 도학들이 오로지 마음을 억누르고 본성을 거스르는 고상한 곡조만 고취하는 것을 통한해합니다. 수준을 좀 낮추어 아예 통쾌하게 자연지성을 인정하고 적절히 절제하면 된다고 말하는데, 이를 어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속마음으로는 이지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아직까지 가짜 도학의 행세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지에게도 여자가 있었습니다. ‘매담연’이라는 여성입니다. 물론 이지에게는 조강지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탁오는 부인을 존중하고 애틋하게 여겼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밝힙니다. 마음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세속의 관례를 어기는 담력과 학문을 추구하는 뜻과 도를 깨우칠 지혜를 지녔으면서, 또한 자기의 뜻과 학문을 공경하고 중시하는 여성, 매담연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신적 사랑을 나눕니다.
조금 의문이 가는 점이 있습니다. <분서>라는 책이 이지 생전에 조판되어 출판됩니다. 분서가 주로 편지글을 모은 것인데, 그렇다면
1.이지는 편지를 보내면서 따로 한 부를 일일이 필사해둔 것인지... 2. 편지를 쓰면서 이미 출판의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3. 편지의 당사자(경정향 등)가 생존해있는데 그렇게 모욕적인 글을 널리 퍼뜨려도 되는지.
프로네 님의 생각을 보내주십시오. 그럼 오늘 하루도 열심히...
2006 9.25 산비
마침내 <분서> 1권을 완독 하였습니다. 우리가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은,
‘첫째, 이지는 어떤 사람인가?’ ‘둘째, 이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셋째, 이지의 가르침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입니다.
이지 스스로 ‘自讚’ 편에서 말하고 있는 바, 이지는 성격이 조급하며 자존심이 세고, 언사는 비속하며 마음 씀은 난폭하고, 행동은 제멋대로이며 남의 잘못을 밝혀내길 좋아하고, 한 번 사람을 미워하면 그와의 관계를 평생 끊어버렸습니다. ‘그러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워한다.’ 저도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그 당시의 사람이었더라도 이지 같은 사람과 친구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지는 ‘자연지성’을 따를 것을 일갈합니다. 동심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기본적 욕망을 억누르고 허세를 떠는 가짜 도학들을 경멸합니다. 옛것을 고집스럽게 따르려 하는 무리들을 한탄합니다. 이지는 자기를 알아봐 주는 이를 찾아 주유하였으며, 책 읽기와 글쓰기에 힘썼습니다. 교분을 나눔에 있어 지위고하를 따지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함에 있어 평등 하였습니다. 이지는 생각에 있어 편견이 없었으며, 글의 소재나 형식, 문체가 독창적이었습니다. 표현에 거침이 없었으며 옳은 것을 옳다고 주장하였지만 시류에 맞춰 굽힐 줄도 알았습니다.
역시 고전을 읽고 나면 뿌듯함이 있습니다. <분서>가 불태워지지 않고 오늘 21세기까지 전해져 온 건 그만한 가르침과 감동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은 엄두가 나지 않을 책을 좋은 도반이 있어 힘을 얻어 완독 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여기서 고삐를 늦추지 말고, 정신을 추스르고 정기를 모아 더욱 정진합시다. 이번 가을은 온 정신을 모아 <분서>와 <장자>에 몰두합시다. 함께 구도의 길을 걷는 도반이 있어 무척 행복합니다.
2006 9.27 산비
과연 올바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나 스스로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까? 누가 그렇다고 가르쳐준 것입니까? 탁오는 말합니다.
“내가 믿는 진리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나 밖의 세계가 만들어낸 ‘도리’와 ‘견문’이 나를 구성하면서 나를 명령하는 진리로 행세할 뿐이다.”
그 진리는 언제부터 나에게 진리였고, 어떻게 나의 진리가 된 것일까? 벽력처럼 제 뇌리를 강타하는 ‘할’입니다. 이지가 말한 바 ‘나이 오십 전까지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라는 말의 진의를 이제야 알 듯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입니까?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이 진리는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그것이 진정 진리인지, 왜 그런지 한 번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아무런 의심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부모님이 그것이 진리 하고 하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였습니다. 나는 진정 한 마리 길들여진 가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람의 진리와 미국 사람의 진리는 같은 가요, 다른 가요? 같은 사람인데, 인간인데 왜 다른가요? 인간이라면 그가 한국인이든, 영국인이든, 에티오피아인이든, 모든 인간이 수긍하는 보편타당한 진리가 있지 않을까요? 우주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에 합당한 진리가 있지 않을까요?
‘누가 그랬다더라’가 아니라 ‘아 그렇구나’ 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기에도 진리인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연후에 그것을 진정한 나의 진리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한 친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너의 어머님이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지금 네가 기독교인이 되어 있지만, 만약 너의 어머님이 불교 신자였다면 너는 지금 아마 절에 다니고 있을지 모른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날 이후 한동안을 회의와 번민 속에서 지냈습니다. 내가 진리라고 믿고 있었던 ‘예수’와 ‘하나님’이 언제부터 나에게 진리였는지, 어떻게 그가 나의 진리가 되었는지 그때까지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마찬가지의 회의와 번민이 내 온 정신을 강렬하게 헤집어놓습니다. 그 범위가 종교와 신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삼라만상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의지와 윤리와 영혼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아! 구도의 길이여! 다시 검증해야 합니다. 하나하나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진정한 나의 진리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사유하는 흉내만 냈으며 진리를 찾는 척만 하였습니다. 그것이 지식인의 멋이라고 여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에게는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현각 스님이, 성철 스님이 왜 그토록 불철주야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에 몰두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듯합니다.
나는 앞에 있는 개가 짖으면 이유도 모르고 같이 따라 짖는 멍청한 개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2006 9.27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