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크고 , 손 커서 뭐 하게?
두툼한 ‘수학의 정석’은 도서관에서 졸다가 이마를 괴는 용도와, 단풍을 눌러 책갈피로 만드는 용도로 늘 바쁘게 굴렸다.
노랗고 빨간 단풍이 갓 구운 김처럼 바삭해지면, 예쁜 것만 골라 문방구에서 코팅하고, 수학시간에는 책상 밑에서 가위질을 해 책갈피로 만들었다.
유독 예쁜 잎은 쉬는 시간마다 나에게 찾아오던 옆반 수진이에도 나눠주었다.
단풍책갈피는 책 속에 자리를 잡거나, 구멍을 뚫어 잔스포츠 책가방 지퍼에 매달기도 했다.
그것은 친구들에게 건네던 작은 낭만이었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 회사에서 일하던 어느 날.
입담이 야무진 후배와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덩치가 있던 그 후배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렸지만, 반말을 섞어가며 사람을 슬쩍 약 올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날도 일을 하다 말고 내 손을 보고는,
“손가락이 왜 이렇게 짧아요? 짧고 통통한 게 딱 단풍손이네. 단풍손! ”
울림통도 큰 애가 사람들에게까지 내 손을 보라며 주의를 끌었다.
그런 뒤 자기 큰 손을 내 손 위에 포개고, 크기를 재며 혼자 신나 키득거렸다.
단풍잎은 예쁘지만, 내 손을 칭찬하지 않는 건 일곱 살 아이도 알 법했다.
맨날 져 주니까 또 시작인가.
유쾌하지 않은 마음에 굳이 눈을 마주 치지 않고 말했다.
“야, 요런 손이 일 잘하고 부지런한 손이거든!”
“발도 작더니 손도 작네요?”
“발 크고, 손 커서 뭐 하게?”
"아니, 너무 짧으니까요..."
후배는 끝까지 말 한 줄을 붙이다가, 단호한 내 표정을 읽고서야 말을 멈췄다.
사무실에는 정적과 함께 키보드 소리만 남았다.
그 와중에도 나는 후배가 말한 '단풍손'이 진짜인지 다시 내 손을 훔쳐보며, 괜한 시선 처리를 하고 있었다.
내 손은 예쁘지 않다.
마디도 도톰하고 주름도 많아 사진 찍을 때면 뒤로 살짝 빼두는 손이다.
섬섬옥수는 아니지만, 장비가 고장 나면 방법을 찾아 움직이고, 요리도 했다가, 필요하면 그림도 그린다.
오랫동안 나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한 손이다.
후배의 입바른 농담에도 마음이 흔들이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사실을 정확히 건드리는 말은, 괜히 더 받아치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오늘은 어색한 인사를 하나 건넨다.
나의 단풍손, 앞으로도 네 덕 좀 보자. 아직 갈 길이 멀다.
살짝 힘을 주어 내 손을 쥐어본다.
오늘은 너도 좀 놀아라, 내 손.
내일부터는 다시 바쁘더라도,
이 손으로 나 갓생 좀 살아보자,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