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에 잠깐 데이트를 했었던 H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처음에 남녀로 만났는데, 우리는 남녀가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으니까 나는 H 씨의 번호를 지우고 카톡에서도 삭제했다. 절대 차단은 하지 않는다. 차단 목록에 있으면 내가 되살릴 수 있으니까 철저히 삭제하는 방법을 택한다. 언제나.
물론 첫사랑은 예외였다. 카톡 아이디를 외우고 있어서, 번호를 잊지 못해서 헤어지고도 나는 몇 번이고 찌질하게 굴었었다. 혼자 그를 목록에서 없앴다가 또 되살려서 염탐할 거리도 없는 그의 카톡 프로필 목록을 한참이나 보았었다. 심지어 카톡도 몇 번이고 보냈다. 멍충이.
아무리 해도 잊히지 않는 사람을 잊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더 끝내주게 멋진, 대면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것.
첫사랑 그를 잊기에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H 씨는 세련된 양복차림에 퀭한 눈을 하고 첫 데이트에 지각을 했다. 너무 바쁜 사람이어서 이해했다. 그 추운 날씨에 회사서부터 내가 기다리는 카페까지 뛰어와서 땀이 맺힌 채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지금껏 만난 누구에게서도 받지 못한 새로운 느낌이 좋았다. 양복이라니. 첫사랑이었던 그는 늘 편한 차림이었고, 그와 헤어진 이후에 데이트했던 K군도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답게 늘 자유로운 차림-흡사 대학생 같은 차림이었다.
H 씨와 했던 그 데이트는, 나도 왠지 그의 드레스 코드에 맞추어야 할 것 같아 얌전한 네이비 색 원피스에 코트를 입고 평소 신지 않는 구두까지 갖춰 신었다.
사회인이 되어, 처음으로 같은 사회인을 만나서 하는 그런 데이트처럼 느껴졌다. 대학생이 아닌, 어른이 하는 첫 데이트.
그는 너무도 능숙했다. 왜 그렇게 귀엽고 예쁘냐고 맛이 가게 칭찬을 했고-예쁘다는 말을 1년에 손에 꼽을 만큼 하는 남자만 만났다 보니 고작 그런 당연한 말에 맛이 갔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나와 뭐라도 되는 양 손을 대뜸 잡았다. 그 순간만큼 그는 나에게 정우성처럼 원숙미 넘치는 절세미남으로 보였다.
그다음 만났을 때는 손 잡고 피맛골을 걸으며 대학시절 추억 얘기를 풀어놓았고, 그가 피맛골의 유래에 대해 말하는데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인데도 처음 듣는 척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요망한 것.
대학시절 피맛골에서 그렇게 술을 마셨다기에, 음주를 좋아하냐고 물으니까 주량이 반 병이란다. "오빠는 주량이 경제적이야. 매력적이지?" 경제적인 주량이라. 술을 잘 못하는 것도, 그의 자신감 넘치는 화법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다 관수 파출소 뒤 어느 골목에선가 사자성어 얘기를 하는데, 그건 또 내가 생전 들어보지 못한 네 글자여서 그의 지성미에 또 한 번 매료되었다.
그는 확연히 드러나는 내 팔의 흉터를 보고도 깊게 묻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내가 아픈 일에 대해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나는 그를 가볍게 만나고 싶다, 고 생각했다.
적당했다. 모든 것이 적당하고, 또 지나친 사람이었다.
첫사랑 그를 잊기에 그의 모든 것이 내 취향에 맞았다. 아주 적당하게. 과하게 나를 매료시키지 않고, 느슨한 관심이 꽤 오래 지속될 만큼 매력이 있었다.
내가 애쓰거나 떠들지 않아도, 그는 나보다 훨씬 많은 말을 했고 늘 나를 웃겨주려 하였다. 그러다 한 번씩 눈을 반짝이며 하는 외모 칭찬을 잊지 않았다.
직업이나 학벌은 지나치게 좋아서 부담은 됐지만, 그 정도 지나침은 한 번 감당해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집이 강남이고, 출퇴근은 전철로 했다. 퇴근할 때는 전철에서 씽씽이를 타고 5분이면 집에 도착한다고 했다.
데이트가 끝나면 종로3가역 12번 출구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서울까지 보러 와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꼭 안고 미간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작고 소중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조금 설레기도 했다.
매일 아침 이른 시간 출근을 한 사무실에서, 혹은 출근 도중에 건네는 '굿모닝'이라는 인사가 쭈욱 이어지자 나는 점점 그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첫사랑인 그는 이제 절대 나에게 연락할 수 없으니까. 살아서도 소소하게 챙기는 일이 드물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성실하게 연락을 주는 사람이면 괜찮겠다, 싶었다.
이제 내가 뭔가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광화문엘 갔다. 일이 있어서 왔다고. 내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야근이란다. 섭섭했지만 야근이라는데... 근데 그 이후로는 굿모닝도 뜸하다. 연말이니까 바쁘겠지. 하지만 말투가 심드렁한 것 같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뭔가 말실수를 했나.
첫사랑 그와 헤어졌을 때,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예뻤더라면, 내가 더 연애나 사랑에 초연하고 여유가 있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그런 실수들. 아니, 내가 조금만 건강했더라면, 평범했더라면. 모든 것이 내 잘못이었다. 헤어지고도 아주 오랫동안 나는 한 덩어리의 실수였고, 한 덩어리의 잘못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금방 식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매력 없는 여자일 뿐이었다.
그때와 같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마음이 고개를 살짝 들려고 했다.
H 씨와 내가 뭘 그리 특별한 사이였다고? 그래서 한 번 거절당한 이후 그에게 다시는 데이트 제안을 하지 않았다. 포기하는 게 훨씬 편하다. 남자가 움직이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내 매력이 거기까지였던 거다.
나는 정말 매력적이고 괜찮은 인간이지만, 어쩌면 이번 생에는 그 매력이 여성들에게만 통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연애고 뭐고 다시는 찌질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가치를 지키기로 했다. (알량한 자존심이 내 가치라면, 난 거의 성공했다.)
첫사랑 그는 처음에는 나를 궁금해했다. 나의 순수함을 신기해했다. 나의 영혼 가장 깊숙한 곳까지를 알려고 했고, 온 우주는 아니어도 적어도 이 지구에 우리 둘 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믿게 했다. 스스로의 매력을 모르는 나를 안타까워했다. 나의 첫사랑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행복해했다.
그러나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내 마음이 자신에게 기우는 것이 너무도 확실히 느껴지는 순간 그는 식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안달하고 손을 내밀었던 남자도 식는데, 고작 데이트 몇 번 한 저 남자에게 난 무슨 기대를 한 걸까.
H 씨의 번호와 카톡을 모조리 삭제하고, 그와 관련된 기억들도 모두 지운다. 그것이 목표였다. 기억력은 또 쓸데없이 좋아서 한 동안 광화문만 가면 그의 생각이 났고, 그의 회사 앞을 지나던 날엔 정말 찔끔 눈물이 날 뻔도 했다.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첫사랑 그의 생각이 나지 않았던 적은. 그땐 그랬었다. H 씨를 삭제하고 나니, 나는 또 한 없이 우울해졌다. 첫사랑 그는 해일처럼 밀려와 다시 나를 삼켰다.
기억력이 지나친 나는, 첫사랑과의 데이트 날짜를 거의 다 정확히 기억했고 그와 관련된 소소한 일들까지 모두 기억했다. 그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어서, 지하철이든 어디든 그의 향기를 맡으면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는 일이 또 시작되었다. 그렇게 울면서 생각했다. H 씨를 만났던 이유. 첫사랑 그와 공통점을 두어 가지 가진 사람이어서. 첫사랑 그를 잊으려고. 나는 처음부터 불순한 목적을 갖고 H 씨를 만났었다. 그러니 잘될 리가 없다. 그게 순리다.
H 씨에게 고마웠다. 야근을 해줘서. 나에게 매몰차게 굴어줘서. 그때의 나를 아침인사로 길들여놓고, 확 끊어버린 건 새끼를 절벽에서 미는 어미 사자 같은 스킬이었다.
잊니, 뭐니 그 길로 때려치우기로 했다. 첫사랑 그를 잊기 위해, 다른 데에 정신을 돌리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일 같은 건 앞으로도 영원히 하지 않기로 했다. 잊지 않기로 하니, 편안해졌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혼자 서야지.
이제 첫사랑 그의 향기를 어디서 마주쳐도 울지 않는다. 그와 너무도 닮은 뒷모습을 보아도 따라가서 얼굴까지 확인하려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절대 그일 리가 없는데 그렇게 모르는 사람을 쫓아가서 그가 고개 돌리는 순간을 포착하곤 했다.-
나는 이제 대체로 멍하고, 대체로 내 생각만 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며칠 전 거의 반년만에 H 씨가 연락을 해 왔지만, 나는 덤덤하다. 그 정도 서로 연락을 안 했으면, 모르는 사이가 되는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데 H 씨는 나와는 사고체계가 다른 사람이겠지. 아니면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 문득 떠오를 만큼 나에게 요망한 매력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푸하하하하하. H 씨 부디 잘 사세요. 광화문에서 만나지 맙시다, 제발.